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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구실] 입 안에서 맴도는 말
[나의 연구실] 입 안에서 맴도는 말
  • 박기영 순천대·생물학
  • 승인 2010.03.22 14: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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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 임용이 될 때 처음에는 지방대 연구실은 무엇인가 평온함이 있을 것 같았다. 여유로움 속에서 학문의 열정을 나름 불태우면서 진정한 학자로, 다정한 선생이면서 선배로,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마음 먹었다.
처음 대학에 부임해서 연구비 신청을 하던 때가 기억난다. 운좋게도 반타작은 한 결과로 연구기자재를 하나씩 채워 넣었다. 당시에 IBRD 차관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연구환경을 갖추지 못했을 것 같다. 요즘 지방 국립대에서는 연구센터 같은 큰 지원사업을 받지 못하는 한, 첨단 연구시설이나 고가의 연구기자재를 갖추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가 없으면 잇몸’ 라는 생각으로 어렵게, 어렵게 실험방법을 개발하면서 온 정성을 다해 한편한편 논문을 쓰고 있다. 정부에서 연구관련 일을 해봤지만 정책을 만드는 사람은 지방대 연구실을 반드시 다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방대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연구실 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정부 관료나 대학 총장은 거의 보지 못했다.

사실 나는 연구실의 대학원생이나 학부생들이 부르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늘 불편하다. 실험실에서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에는 이러한 권위적인 호칭이 오히려 학생들과 나 사이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진정으로 연구를 같이 고민하고 답을 찾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싶다. 내가 부덕한 탓도 있겠지만 학생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견고한 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아마도 지방대라서 학생들이 위축돼 있고 자신감도 부족하니 그 벽이 더 두터운 것 같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사고락을 같이 해도 학생의 미래가 보장되기 어렵기 때문에 “같이 고생하자”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열정을 강조한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같이 열정을 다해보자고 말하고 싶지만,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 학생의 미래를 개척해줄 자신이 있는가를 먼저 스스로에게 반문해본다. 그럴 때마다 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진다. 특히 4학년 학생들에게 “생물학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다. 전공을 살려 사회로 진출하는 게 어렵고, 그렇다고 연구를 강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학생을 위한 것인지 자문이 들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학생들에게 말하길, 바늘구멍도 통과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논문으로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몸값을 높이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연구실에서 현미경 사진을 잘 찍고, 독해를 잘하는 것도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기술이라는 궤변(!) 같은 주장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려고 노력도 해본다. 자기소개서를 수차례 수정하면서 입사원서를 준비하고, 취업사이트도 검색하고, 인터뷰용 슬라이드를 같이 만들어보기도 하고, 아는 사람에게 취업도 부탁해본다. 내가 연구에 열정을 다하고, 좋은 논문을 쓰고, 연구비에 선정되는 것이 우리 실험실 학생들의 고생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아둥바둥할 때도 있다. 

그러나 청년실업율이 높은 한국사회의 파고를 넘도록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너무도 안쓰럽고 힘겹다. 그렇지만 못내 ‘사회에서 선택받은 구성원’이 되도록 함께 노력하면 그들이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을 가져본다.

 

박기영 순천대·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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