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8:25 (금)
‘대관령 옛길’을 넘는 겨울 자작나무 두 그루의 풍경
‘대관령 옛길’을 넘는 겨울 자작나무 두 그루의 풍경
  •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 승인 2010.03.15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산의 미학<3>_ 시인 김선우와 화가 임만혁 그리고 강릉

임만혁에게 가족의 포근함은 빨강과 파랑, 노랑과 초록으로 채색된 감수성으로 발현된다. 「나의 가족 06-2」, 한지에 목탄 채색, 148x106cm, 2006(위), 「나의 가족 05-6」, 한지에 목탄 채색, 148x210cm, 2005.

홍상수는 이미 고전이 된 「강원도의 힘」(1998)에서 ‘강원도’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바 있다. 이 영화에서 드러난 강원도는 대도시 변두리와 질적으로 많이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일상을 압도하는 자연의 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물과 자연은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주인공들의 시선을 통과하는 숲과 계곡, 바다는 그들의 심성처럼 을씨년스럽다. 「강원도의 힘」 이후 적어도 예술을 표방하는 모든 작품은(또는 세련됨을 지향하는 문화산업은) ‘강원도’를 예전처럼 낙관적, 긍정적으로만 묘사할 수 없게 됐다. 그렇게 이 영화는 합의된 판타지, 상투화된 이미지에 균열을 가하는 리얼리즘 영화의 좋은 모델로 자리매김 됐다. 

    「강원도의 힘」에서 ‘강원도’라는 시공간을 바라보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 또는 영화감독의 시선은 외부자, 또는 구경꾼의 시선이다. 그 또는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어진 시공간을 마주 대한다. 그러나 이런 ‘거리’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말이다. 그들에게 강원도의 산과 바다, 도시는 무관심한 관조의 대상이나 구경거리라기보다는 삶과 분리불가능하게 얽혀있는 시공간-문맥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하여 그들의 몸에는 그 색채, 그 냄새, 그 촉감, 그 소리가 고스란히 각인돼 있다. 그리고 여기 젊은 예술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화가이고 한 명은 시인이다. 이 두 작가는 강원도,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강릉의 기억들이 이들의 작품에 스며든다. 그렇게 우리 앞에 등장한 강원도는 환상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을씨년스럽다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독특한 체험을 선사한다. 

환상과 을씨년스러움을 넘어서

    임만혁은 바다와 방파제, 등대와 함께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여기에는 강릉과 주문진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기억이 각인 돼 있다.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장난치는 아이와 그 옆에 있는 개, 실 꾸러미를 고르는 여인들, 하염없이 바다를 보는 사람, 낚시를 드리운 허리 구부정한 남성을 본다. 목탄으로 날카롭게 죽죽 그어 내린 선들은 유년기, 사춘기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을 반영한다. 이 예민한 소년에게 ‘가족’은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대부분 그들은 서로를 외면하며, 같이 있는 경우라도 연대는 매우 아슬아슬하다. 비좁은 배 위에서의 즐거운(!) 시간은 금방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다. 작가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인간들은 시간 앞에서 풍화되고 무기력해지며 삶 속에서 허약해지고 손상되기 쉬운 인간들이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서 무엇인가를 헛되이 기다리며 앉아 있거나 삶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에 길들여진 인간들이다.”

    이 소년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대개 나약하고 수동적인 모습이다. 반면 어머니는 좀 더 능동적이고 긍정적이다. 이 어머니가 소년의 삶과 기억을 포근히 감싼다. 이 포근한 느낌이 빨강과 파랑, 노랑과 초록으로 알록달록 채색하는 감수성을 낳았다. 가족을 위협하는 외부의 힘은 넘실대는 파도다. 밀려오는 거센 파도를 막기 위해 소년은 방파제를 만든다. 임만혁의 그림은 가족을 사랑하는, 또는 그리워하는 바닷가 마을 소년의 이야기다.


    시인 김선우에게 고향 강릉, 강원도는 생의 젖줄이자 고즈넉한 삶터다. 물론 그 고향은 행정구역상의 강원도 강릉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머니 땅’으로서의 원초적 고향, 원체험의 세계다. 꽃 새 바람 무지개 구름 나무 바다 은하수 별은 그 어머니 땅을 이루는 무수한 이름들이다.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향수」는 시인을 고향 강릉으로, 아홉 자식의 어머니에게로, 강릉 이전의 어떤 땅으로 데려간다. 시인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 / 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 / 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 망 좀 보그라 호박 / 넌출 아래 슬며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 / 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 / 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 / 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각하 / 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양변기 위에서」 全文

    시인이 소망하는 상태는 똥이 거름되는 순환적 상태다. 그것은 양변기 위에서는 도대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시인은 그 양변기를 적으로 삼는 대신 문학평론가 김수이의 말을 빌자면 “살아있는 몸 속에서 생성된 생즙의 약효로 자연의 몸을 치유해 생명의 원상을 회복하고자” 한다. 

“알 것 같네 어머니는 물로 빚어진 사람 / 가뭄이 심한 해가 오면 흰 무명에 붉은, / 월경 자국 선명한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 기우제를 올렸다는 옛이야기를 알 것 같네 /
저의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 -「물로 빚어진 사람」 部分
“몸에서 퍼올린 즙으로 비를 만든/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진술하는 시인은 또한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完經」 部分)이라고 진술하는 시인이다. 김수이의 말대로 그는 “살아있는 몸을 신전으로 하여 뭉클한 생명의 향연을 펼치는 샤먼”이다.

생명의 향연을 펼치는 샤먼

    언젠가 시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린 날의 내 고향 바다가 나에게 준 가장 아름다운 幻影은 거대한 반지처럼 우주가 이어져 있다는 아득한 느낌으로 내 몸 깊은 곳에 아로새겨져 있다.”(『김선우의 사물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종종 바다를 그리워하여 병을 앓게 되는 것은 내 유년의 어느날-바로 ‘그’ 순간의 기억이 나를 이루는 질료들을 건네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고향 체험과 기억이 지금 생태학적 상상력으로 충만한 시들의 모태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강원도에 대한 시인 자신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이 험한 자연으로 인해 큰 규모를 탐하는 마을이 들어설 수가 없으니 자연히 국가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변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변방의 힘이 오히려 이 땅을 지켜온 셈. 나는 인간이 쉽사리 깃들일 수 없는 강원도의 자연에 외경을 보냅니다. 인간이 쉽사리 깃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 강원도의 자연은 비인간적입니다. 이 별 전체가 인간중심주의의 맹목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때, 反생태적인 것은 결국 反 인간적이기도 하다는 테제는 우리의 ‘삶의 질’을 근원적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강원도의 자연은 비인간적이므로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 됩니다. 즐기고 소비할 거리를 찾아 함부로 발 디뎌서는 안 되는 땅, 강원도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긴급하고 열렬한 상징입니다.(『물 밑에 달이 열릴 때』)”

    견강부회의 위험을 무릅쓰고 문학평론가 이명원의 묘사를 가져와 시인 김선우, 그리고 화가 임만혁의 작품 세계를 일단 ‘따뜻한 비관주의’라고 간주하면 어떨까. 이 따뜻한 비관주의에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나는 홍상수가 펼쳐놓은 스산한 폐허에서 새로운 좀 더 희망적인 계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김선우 시의 한 구절.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대관령 옛길」 部分) 

홍지석 객원기자·미술평론가 kunst75@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