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02년 4월 5일 ● 장소 : 교수신문사 회의실
● 사회 : 이상훈 대진대 교수(철학)
● 참석자 : 강내희 중앙대 교수(영문학), 강신익 인제대 교수(의철학),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학), 이필렬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과학사)
이상훈(사회) : 모처럼만의 휴일에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모전의 심사를 맡았던 여러 교수님들께서 우리 지성계의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과 더불어 심각한 문제를 느끼시는 것 같았습니다. 학술에세이라는 장르를 열고자 했지만, 정작 투고된 글들은 아쉽게도 기존의 정형화된 논문 틀을 채 벗어나지 못했거나 아니면 신변잡기 수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먼저 본심 심사위원장이자 생명이라는 주제를 기획했던 이필렬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이필렬 : 생명이라는 주제를 혼자 결정한 것은 아니고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선정한 것이었습니다. 충분히 학술적인 주제였고, 시의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자를 포함해 인문사회과학자도 다룰 수 있고 자연과학자도 다룰 수 있는 주제였죠. 응모자들이 자신의 학문적인 바탕을 토대로 이 주제에 접근하기를 기대했었는데, 문제의식을 가진 작품이 없었다는 것에 상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 지금의 학계 구조 속에서는 새롭고 창의적인 글쓰기의 확대를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 강내희 |
강신익 : 저는 먼저 내용의 측면을 거론하고 싶습니다. 생명공학과 관련된 글들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생명공학이 많은 문제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한 글이 없었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줄기세포가 어떻고, 배아 복제가 어떻고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생명을 복제하는 것이니까 안돼’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근거가 무엇이고, 철학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의 고민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을 이해하는 폭이 지나치게 한정돼 있는 것이죠.
이필렬 :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나라 교육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과, 문과, 개별 분과학문에 너무 갇혀있는 것이죠. 더 유연하게 여러 분과학문들을 다양하게 접하면서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랐다면 좀더 폭 넓게 생명 문제가 다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학술 논문이 아니라 좀더 폭 넓고,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글쓰기가 필요합니다. - 이필렬 |
사회 : 생명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시대 정신을 일관되게 꿰뚫어주는, 포괄적이고 창조적인 글쓰기를 바랬었는데 우리들의 기대에 못미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우리 고등교육 기관이 갖고 있는 지식 생산 체계가 분과중심으로 돼 있다는 점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분과 학문에 갇힌 글쓰기와 상상력
강신익 : 지나친 분과중심주의로 인해 학제간의 교통이 단절돼 있다는 점에서 동감합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면, 프랑스의 깡길렘이라는 학자는 내용이 완전히 철학인 박사논문으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못 꿀 얘기죠. 의학박사면 당연히 실험을 해야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가지고 학위를 받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학문간의 연계가 안 돼 있다는 얘깁니다. 우리나라 학계의 철두철미한 담 쌓기,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옥죄고 있는가를 정확히 인식해야 된다고 봅니다.
강내희 : 저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공저한 ‘제국’이라는 책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마이클 하트는 미국 듀크 대학의 문학과 소설연구학부 교수입니다. 마이클 하트의 책이라고 하면 으레 인문학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국’은 인문학 책이 아닙니다. 보면 사회과학 책이예요. 사회구성체론이고. 아마도 한국이었다면 그 사람은 영어영문학회에 그 논문을 발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제대로 된 학술에세이를 찾아볼 수 없는 또 다른 요인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1995년 이후부터 대학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지식인 사회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업적위주의 교수평가가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이 교수들로 하여금 논문 글쓰기에만 매달리게 했다고 봅니다. 교수평가에서 중시되는 것은 소위 말해 학술지에 실릴 수 있는 ‘논문’입니다. 이번 공모전에서 요구한 학술에세이가 지식인 대중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글인 것과 달리, 학회지에 실리는 글은 전문가들끼리만 알 수 있는 글들입니다. 앞으로 학회 중심의 교수 평가, 학회 중심의 지식인 통제가 강화되면 될수록 수준 높은 학술 에세이는 더욱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학술에세이는 평가 대상이 아닌 만큼 그런 글을 쓸 시간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는 거죠.
사회 : 대학교육개혁이라는 기치 아래 구성된 여러 제도와 평가 방식들이 오히려 부작용을 불러왔다는 말씀이시군요.
◇ 우리에게는 논문이 아니면 아주 가벼운 글이라는 천박한 이분법이 있습니다. - 이상훈 |
배병삼 : 상당히 중요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사회적으로 다양한 층위에서의 요구사항과 필요성을 인지하는 ‘나’의 부재가 이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에세이라는 것은 논문쓰기에 사용되는 논리성과 객관성의 산을 넘어서 결국 ‘나’ 속에 담기는, ‘나’ 속에서 발효되는, 내가 씹어서 일종의 메아리를 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신변잡기적인 수필 수상의 맥락이 아닙니다. 에세이란 자신이 처한 상황의 사회성, 주제가 갖는 역사성들에 대한 고민들이 새로운 형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주제와 싸우고 그 싸운 결과를 공표한다는 것이죠. ‘나’가 명확하게 부각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에세이라는 표현 속에는 다양한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그 속에 농밀하게 녹아 있다고 봅니다.
사회 : 아카데미 전체가 어떤 지적인 전거를 끌어모으는 데 있어서나 종합적인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데 있어서 취약한 대목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자유로운 사유 실험을 전개시킬 수 있을지 논의해 보았으면 합니다.
배병삼 : 저는 한마디로 창조적 글쓰기의 원천을 ‘사무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사회에 대한 ‘나’라는 존재의 표명, 이 땅에 태어나서 마땅히 해야될 것이라는 자기 당위,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임함으로써 빚어지는 윤리의식 등이 겹쳐진 ‘사무침’이, 창조적이면서도 깊은 사유를 담지한 글쓰기를 이끌어낼 것입니다. 진정한 에세이란 ‘사무침’이 미적형태로 표현된 것일 테죠. 논문이 기계적이고 물리적이라고 한다면, 에세이는 사무침으로 소화시켜서 피워낸 한떨기 꽃일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성과 열정과 어떤 책임의식, 윤리의식이 함께 어우러질 때 나타난 사무침이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 학계의 철두철미한 담 쌓기,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옥죄고 있는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 강신익 |
강내희 : 저는 구조적인 문제를 또다시 거론하고 싶습니다. 대학에서 이뤄지는 교수업적평가는 결국 수량적인 평가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분과학문 체제로 나눠진 학계의 폐쇄성과 기존의 개념과 형식을 뒤집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계의 경직성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더 창의적이고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사고를 하려는 논문일수록 기존 학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죠. 기존의 학문제도가 학문후속세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지금의 학계 구조속에서는 새롭고 창의적인 글쓰기의 확대를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배병삼 : 과거에는 글쓰기의 형식이 아주 다양했습니다. 논설에서의 논과 설은 각각 다른 체입니다. ‘정치학 원론’할 때의 ‘원’체는 과학적인 글쓰기입니다. 책이라고 하는 것은 계책문, 즉 정책적 대안입니다. 퇴계의 사칠논쟁은 서간문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 에세이라는 표현 속에는 다양한 글쓰기에 대한 갈증이 농밀하게 녹아 있다고 봅니다. - 배병삼 |
이필렬 : 우리 나라에서 학계는 논문 스타일의 글쓰기에 집착하고 그것만으로 평가합니다. 그 외에 가볍게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죠. 학자로서 남들에게 인정받고, 학회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갖고 싶다, 좋은 학술 논문을 많이 쓰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좀더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글을 쓰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글의 주제와 밀도는 상당한 수준이지만 대중적인, 그러므로 학회지에 실리지 않는, 그러한 글쓰기가 들어설 공간이 별로 없습니다. ‘학술적 논문’에만 치중돼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인 논문이 아니라 좀더 폭 넓고,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글쓰기가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번 심사를 통해 공모작들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논문만을 중요시하는 글쓰기 모형이 응모한 사람들의 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렇지 않으면 글쓰기를 가볍게 생각하고 그런 글을 즐겨쓰는 사람들의 스타일이 영향을 미쳤는지 말입니다.
배병삼 : 좋은 문제 제기를 해주셨는데, 저는 가벼운 글쓰기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가벼운 글쓰기에는 경망스러운 글쓰기와 경쾌한 글쓰기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경망과 경쾌를 나누는 것은 심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내 스스로 껍질을 벗겨서 주제와 대결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무거움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표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저 남의 얘기들을 짜집기하는 것, 각주들은 굉장히 많은데 자기가 빠져버린 얘기, 이런 글들은 무겁기만 한 글이죠. 한국 학계에서는 가벼운 글, 더 나아가 경쾌한 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가벼운 글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에세이, 사회에 대한 ‘나’의 존재 표명”
사회 : 전체적으로 한국에서의 글쓰기는 비판적 정신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판적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실제로 교단에서 제자들이 비판적 글쓰기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논문 아니면 아주 가벼운 글이라는 양대논법이 적용되는, 천박한 이분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한 글쓰기를 끌어낼 것인가가 저희들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이필렬 : 우리 나라의 경우 사실 지식을 생산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대부분 대학에 있는 사람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대학 나름대로의 몫을 담당하면서 대학밖에서는 에세이적인 글쓰기가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 밖에서는 그런 공간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지금처럼 대학이 계속해서 논문을 많이 쓰는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밖에서도 그런 사람을 훌륭한 지식인으로 평가한다면 학술에세이적 글쓰기는 살아남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봅니다.
강신익 : 대학만이 지식을 생산하는 공간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은 대단한 매체입니다. 인터넷 글쓰기는 또 다른 장르입니다. 인터넷의 글들을 보면 어떤 것은 경망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용도 좋고, 문체도 좋고, 감동적인 글도 많습니다. 인터넷이 주는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새로운 글쓰기의 확대에 인터넷이 중요한 매체가 되리라고 봅니다.
강내희 :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죠. 그런 식의 글쓰기가 지속 반복 가능하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인터넷은 자기를 알릴 수 있는 기회는 됩니다. 그러나 물적 기반을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인터넷의 거의 모든 글들이 무료로 배포되는 것 아닙니까.
지식 생산의 공적 기반 확보해야
배병삼 : 지방대 강사로 생활하는 분들의 상황도 언급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방대 강사들은 학교에서 시간 강의를 맡는 것 외에 지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산이 제 2의 도시라고는 하지만, 부산의 계간지 가운데 문예지는 한 종류만 있습니다. 물론 많은 출판, 언론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서울에서 하는 것처럼 활동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대다수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봉쇄된 상태입니다.
사회 : 사실 지금은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려고 해도, 재정적인 문제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나 출판밖에 없고, 오프라인의 다양한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죠. 교수신문사에서 학술에세이를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이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언론이, 출판 구조뿐만이 아니라 언론구조에서 글쓰기의 다양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인프라를 준비해보겠다, 하는 관심은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또한 인터넷에서의 글쓰기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재생산구조로 견실하게 이어지게 하는 포럼이라든지 구체적인 움직임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지속적인 힘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는 고민해 볼만한 주제라고 봅니다.
강내희 : 제 생각으로는 인터넷에서 대안을 찾기 보다는 사회가 공적인 차원에서 지식생산에 투자하는 형태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회 : 서양사회가 지식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공적 기반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공적인 차원에서 대학이나 연구소, 수도원 등에서의 다양한 형태의 학문 활동, 다양한 형태의 담화, 이른 바 시민의 광장들을 육성해줬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체계적인 육성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강내희 : 가령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말이죠. 도서관 같은 데서 기본적으로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책들을 세 권인가 다섯 권인가를 구입하지 않습니까. 그런 분야의 책들이 3천부, 4천부 나가는 것이죠. 일본도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책을 많이 사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사회 구조를 만든 것입니다. 이런 방법들이 우리 지식생산의 공적 기반 마련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로 지금의 대학구조가 전반적으로 바뀌지 않는 상황이라면, 대중의 동의에 근거한 지식인운동, 독서운동, 출판운동 등을 전개하거나, 실험대학 등을 구성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 볼 시점이라고 봅니다.
배병삼 : 강내희 선생님께서 실험대학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런 맥락을 제가 소화시키자면, 논문 글쓰기도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카데미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글쓰기가 전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논문 글쓰기라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강을 건너 그야말로 사무치는 형태로 대중에게 발언하는 사유의 힘, 그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회 : 지금까지 논의된 것들을 큰 가닥으로 몇 가지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일단 우리가 앎과 삶과 행위를 총체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치열한 비판정신을 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창조적인 글쓰기가 나온다,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나라 지식 생산구조의 전반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모두들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글쓰기 형태들이 가능하도록 국가는 제도적으로, 대학은 실험적으로, 우리 개개인 연구자들은 자기의 벽을 넘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죠. 또한 새로운 글쓰기의 한 유형으로 교수신문사가 학술 에세이를 공모했듯이 앞으로도 다양한 글쓰기의 형태에 대한 고민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 모두 중지를 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특집 좌담이 시대 정신을 개척하는 창조적 글쓰기, 학문들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비판적 글쓰기, 그리고 학술과 생활문화를 통합하는 크로스오버 글쓰기를 만들어내는 산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을 나눠주신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진행·정리 허영수 기자 ysheo@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