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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작가선언은 한국문학의 사건 ‘페티시즘’ 비난은 방관자의 평가절하”
“6·9 작가선언은 한국문학의 사건 ‘페티시즘’ 비난은 방관자의 평가절하”
  • 교수신문
  • 승인 2010.02.2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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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교수신문 문화비평을 읽고

시간을 분절하는 까닭이야 생활의 편의에 있겠으나, 그러한 편의에 익숙해지다 보면 역동적인 삶의 흐름을 놓치기 십상이다. 문학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니 2010년 문학계의 동향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최근 2, 3년 동안의 문단 흐름에 주목해야 하리라 싶다. 이를 위해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사건이 2008년 상반기의 촛불집회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문학은 정치(현실)의 겉면에서 부유하는 형국을 면치 못했다. 2000년대 문학의 새로운 세대를 운운하면서 문학에 깃든 정치의 흔적마저 말소하려는 시도까지 과격하게 펼쳐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논자로는 김형중(조선대 국문학), 이광호(서울예대 문예창작)를 꼽을 수 있다.


2008년 상반기의 촛불집회는 이러한 문학계의 경향에 대해 문학 바깥으로부터 가해진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했다.  당시 가을 계간지들의 관심이 온통 촛불집회에 쏠렸다는 사실이 그로 인한 충격을 방증한다. 당시 <창작과비평>의 특집이 「이명박 정부, 이대로 5년을 갈 것인가」였으며, <문학과사회>의 특집은 「‘촛불’과 미디어의 수사학」이었다. 또한 <실천문학>에서는 작가들의 「촛불집회 참관기」를 게재하였고, <문학동네>에서는 기획좌담 「촛불은 질문이다」를 마련하였다. 이 위에서 문학과 정치의 관계 설정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2008년 겨울 <창작과비평> 특집 「문학이란 무엇인가」, 2009년 봄 <문학동네> 기획 「2009, 문학성의 새로운 구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는 랑시에르(Ranciere)에 관심이 쏠린 배경이기도 하다.

2010년 문학계의 흐름과 전망

2009년 문학계 최대의 이슈로 떠오른 두 가지 사건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주지하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그 동안 힘들게 확보해왔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하나하나 압살해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석영은 이명박 정부와의 동행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나섰다. 황석영은 1970년대 이후 자유실천문인협회(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의 확대에 크게 기여해 온 것으로 평가받는 존재였기에 그 파장이 만만치 않았다. ‘황석영 변절 논란’이란 바로 이를 가리킨다. 그 반대편에 놓이는 사건이 ‘6·9작가선언’의 등장이다. 노무현 前대통령의 자살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 모임은 젊은 문학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간 정치 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삼갔던 이들까지 결집했고, 구성원들이 젊었던 만큼 이후 한국문학의 향방과 연동될 터이기에 하나의 사건이라 이를 만했다. 6·9작가선언은 6월 9일 서울시청 앞에서 ‘한 줄 선언’을 하고 이를 묶어 『이것은 사람의 말』(이매진)을 펴냈으며, 용산 철거민 참사와 관련해서는 『지금 내리실 문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를 출간했다.

2010년 문학계는 이러한 흐름 위에서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6·9작가선언의 활동은 당분간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지난해 용산문제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갔던 탓에 그에 대한 대응으로 역량이 모이기는 했으나, 구성원들의 관심은 다양하게 포진해 있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문화예술위원회 사태’의 경우 관련 주체와의 연계활동까지 논의된 바 있으며, ‘언론 문제’를 둘러싼 반성도 심각하게 전개됐다. 그 와중에 중앙일보에서 주최하는 ‘미당문학상’ 예심 대상에서 제외시켜 주기를 요청한 시인이 네 명이었다는 사실도 이 기회에 밝혀 둔다. ‘4대강 사업’에 관한 토론방도 마련해 놓은 상태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러한 활동을 벌인다는 것은 시민단체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현재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상태이다. 문학매체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그냥 묵과하고 넘어서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에서는 작년 11월부터 매월 ‘통찰과 연대’라는 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관성에 따르는 운동을 지양하고, 시대의 변화에 호응하면서 새로운 현실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이러한 시도가 한국작가회의에서 어떻게 공유되는가는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황석영 변절 논란’에서 드러났듯, 자유실천문인협회 세대들 사이에는 그들이 거둔 민주주의 성과를 사유화하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반면 조직 내부에서 ‘최근 황석영의 언행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입장’이라는 성명서가 즉각 발표됐을 정도로 이에 대한 견제도 작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포럼에서 추구해 나가는 가치가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는 방향에서 영향력 확보로 이어지는가가 중요한내용이다.

한편 이러한 경향에 대한 비난도 존재한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6·9작가선언의 등장에 대하여 <교수신문> 제524호(2009.6.22)를 통해 “작가선언문에 이름 석 자를 올리고 대충 ‘한 줄 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당신들의 이중적 태도’)이라고 평가 절하한 바 있다. 그러면서 당시 황석영의 태도를 변절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문인들의 설문 결과를 병렬하면서 ‘이중적 태도’라고 질타했다. 어떤 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입장을 6·9작가선언의 입장으로 치환해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 얼마나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또한 밖에서 대충 보기에는 ‘너무도 쉬운 일’로 비춰질지 모르겠으나, 이는 방관자의 안일함에서 비롯되는 현상에 가까울 수 있다. 그는 <교수신문> 제544호(2009.12.21)에서도 비난을 이어갔다. 6·9작가선언이 “용산참사에‘만’ 관심을 피력하는 것”을 ‘고착’이라 규정하고, “善에 속하기 위해서는 反이명박만 외쳐도 충분하다. 페티시즘의 윤리, 그것은 오늘날 한국문학의 윤리”라고 규정했던 것이다(‘페티시즘과 반복’). 6·9작가선언의 다양한 지향을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만’ 파악해 나가는 능력도 놀랍거니와, 내부에 잠복해 있을지 모르는 깊고 다양한 고민과 갈등을 ‘反이명박’이라는 구호로 단순화해 내는 능력도 대단하기 이를 데 없다. 설령 백번을 양보해 6·9작가선언의 활동을 ‘反이명박’이라는 구호로 묶더라도 이는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일 아닐까. 페티시즘을 경계하느라 ‘反이명박’ 활동조차 폄하해 버리는 행태와 비교한다면 말이다.

비판의 윤리 또는 다양한 고민의 필요성
물론 6·9작가선언, 한국작가회의의 ‘성찰과 연대’ 포럼 등의 활동이 결국 미미하게 종결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학은 결과를 보고 달려들기보다는 과정 속에서 그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의 변화를 꾀할 수 있고, 이러한 변화를 통해 바깥세상의 변화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때 묻지 않은 작가가 도덕적인 낙차를 통해 사회를 질타했던 지난 시절의 ‘문학 운동’과 최근 벌어지는 다양한 시도들이 변별되는 지점이다. 가령 상층 지도부가 있어서 조·중·동에 대한 입장을 각자에게 강요하지는 않고, 다만 각자가 불편함을 느끼며 고민할 수 있는 수준에서 틀을 유지할 수 있는 방식. 이러한 노력만 이어지더라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 체험은 어디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각각의 ‘나’ 안에서 ‘우리’로 향하는 어떤 실마리로 남아있을 테니 말이다. 2010년 한국문학은 이렇게 문을 열고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문을 나서는 자만이 길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홍기돈 가톨릭대·국문학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비평과 전망> 동인을 지냈으며, <작가 세계> 편집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근대를 넘어서려는 모험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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