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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하는 주체’를 읽으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보인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읽으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보인다
  •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사회학
  • 승인 2009.12.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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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동진 지음, 돌베개, 2009)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란 책의 바탕이 된, 역시 같은 제목으로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나는 이 글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요약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장기적인 그러나 심원한 변형을 겪어왔다. 그리고 이런 변형의 과정은 단지 경제적 삶의 영역을 변화시킨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주체성의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줄여 말해, 자본의 구조조정은 ‘노동하는 주체’의 구조조정이었고, 경제적 삶의 리엔지니어링은 또한 주체성의 리엔지니어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의 정체성의 변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상호구성적인 과정으로서 새로운 주체화의 과정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이를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주체화의 정치학으로 정의하고 분석한다.” 글을 쓰기 시작한 즈음, 외환위기를 전후해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성행하고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리엔지니어링이니 개혁이니 하는 유령같은 말들이 떠돌아다녔다. 이미 10년도 지난 일이지만 이런 추세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자본의 삶에 동조된 삶의 형태
물론 이는 비단 한국 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어느 학자의 말을 빌자면 자본의 새로운 문화적 회로라고 부르는 것과 함께 지구화는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첨단 이동통신사업체가 중국에 들어갈 때 그것은 자본과 함께 일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방식은 물론 노동하는 삶의 인격을 구성하는 새로운 원리 역시 함께 가져간다. 줄여 말해 지구화와 더불어 순환하는 자본은 자신의 경제적 가치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장된 문화적 가치 역시 운반한다. 그것은 다양한 원천에서 비롯된다. 초국적 기관이니 매체니 하는 것이 경제 현실을 가리키고 묘사하는 새로운 언어들을 만들어낸다. 지금은 국내 유수 대학들이 앞 다투어 설립에 애쓰는 MBA니 하는 과정을 통해서든 아니면 글로벌 기업이 조직하고 개최하는 포럼, 컨퍼런스, 연수같은 프로그램들 역시 자본의 새로운 운동방식에 조율된 삶의 형태를 생산한다. 그렇지만 비단 이런 것들이 굳이 직접적인 경제적 표상을 취할 필요는 없다. 가장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세계로 간주될 만한 곳에서도 역시 자본의 삶에 동조된 삶의 형태가 생산되고 조형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바로 자아, 특히 흔히 자기계발, 자기주도, 자기책임, 자기경영, 자아존중감 등의 말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자기를 향상시키고 자기를 돌보는 주체일 것이다. 그것은 복지국가이든 아니면 개발국가이든 조직된 사회적 노동자 혹은 성장과 발전을 통해 부의 분배를 수취하는 국민으로서 자신의 경제적 삶을 이해하던 노동자들을 자기의 행위와 성취를 통해 보상을 받는 사람으로 재구성하는 일을 한다. 월급쟁이에서 연봉생활자나 재테크를 하는 주체가 됐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보상의 형태나 경제적 생존 방식이 바뀌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경제적 삶을 대하는 주관적 세계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거울을 비추는 것처럼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 놓인 주체들의 모습을 통해 다시 반영된다. 이를테면 획일적인 내용과 엄격한 기율을 통한 교육으로 상징되는 ‘학교사회’를 자율적인 선택과 책임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는 주체를 길러내는 ‘학습사회’로 바꾸자는 주장은, 얼핏 듣기엔 매우 그럴 듯하게 들린다. 그렇지만 실은 거기에서 요점은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교육의 장 안에서 전연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윤리를 자신이 자신에 대해 맺는 관계와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자신을 어떻게 표상할 것이고 또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것들을 아우르는 것이라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를 생산하고 동원한다. 그 윤리의 이름이 자기계발이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말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란 크게 세 가지의 차원을 아우른다. 그것들은 각기 담론, 테크놀로지, 그리고 규범을 가리킨다.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란 그를 구성하는 사회, 경제적 삶에 관한 표상을 재구성하며 현실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장, 발전, 생산성, 능률과 효율 등의 개념은 전연 자명하지 않다. 그것은 비규정적인 경제적 현실을 일관된 담론적 대상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기준을 획득한다. 나아가 경제적, 사회적 삶을 새롭게 문제화하는 것은 그에 적합한 주체란 무엇인가에 관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담론, 테크놀로지, 그리고 규범
따라서 일터에서 노동하는 삶이든 학교에서 교육받는 삶이든, 새로운 담론은 주체가 좇아야 할 이상을 생산하고 다양한 지식을 형성한다. 노동자에서 인적자원으로, 국민에서 능동적 시민으로, 학생에서 자기주도적 학습자로 각각의 사회적 삶의 주체를 가리키는 용어들이 바뀔 때, 이는 그저 이름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런 삶에 속한 모습들을 객체화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도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해당되는 사회적 삶의 내용과 성격을 새롭게 규정할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일하고 배우며 살아가는 삶이 적합하고 올바른 것인가에 관한 지식과 규범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는 그와 짝을 이루는 잡다한 테크놀로지를 동원한다.

나는 이런 분석을 위해 마르크스의 편에서 푸코를 읽고 또 푸코의 편에서 마르크스를 읽는 작업을 염두에 두었다. 최근 많은 이들이 부쩍 관심을 갖는 70년대 중후반 푸코가 진행한 세미나는, 자유주의적 국가의 등장과 그 특성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담고 있었다. 또 그 세미나에 참석한 제자들에 의해 여러 가지 분석의 기획이 이뤄졌다. 그것은 지금 한참 유행하는 생정치 담론과 이어져 있기도 하고 또 보이지 않는 부정적 정치철학의 형태로 랑시에르나 바디우같은 포스트-알튀세르주의적 철학자들의 사유 속에 스며들어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흔히 통치성이라고 부르는 푸코의 분석틀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자본주의적 주체화의 계보학적 분석이었다. 푸코라면 ‘권력’이라고 불렀을 그 명목론적인 개념을 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배란 개념으로 고쳐 읽으며 한국사회에서 자본주의적 변화와 주체성의 변형 사이에 놓인 관계를 추적하려 했다. 그러나 그 분석이 반쪽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 역시 강조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렇게 권력이 겨냥하고 조형하는 주체로부터 분리된, 즉 사회적 삶 속에 놓인 주체로부터 탈출하는 정치적 주체의 모습은 이런 분석에서 결코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사회학

필자는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당비의 생각> 기획주간을 맡고 있으며, 저서에는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미노타우로스의 눈』(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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