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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겨울, 정치가 학문을 흔들었다
2009년 겨울, 정치가 학문을 흔들었다
  • 박수선 기자
  • 승인 2009.12.15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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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사업 선정, 정치적 고려 사실인가

중앙대 독일 연구소의 인문한국지원사업(HK) 탈락이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에 대한 정치 탄압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앞서 중점연구소사업 선정결과에서 탈락한 민주사회정책연구원이 비슷한 이유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한국연구재단의 해명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부당하게 탈락했다’는 의혹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되고 있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을 세 개의 등급으로 분류했다는 리스트의 존재는 기정 사실화된 분위기다. ‘배후에 누가 있다’ 등 확인 불가능한 이야기로 학계는 뒤숭숭한 연말을 맞고 있다. 그래서 물어봤다. 정치적 고려가 사실인지, 그리고 가능한지.
“인문학의 특성상 교수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다. 성향을 가지고 지원사업 선정에서 탈락시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명단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교육과학기술부의 한 관계자는 이런 의혹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 단장을 맡았던 교수의 말이다. “시국선언에 참여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사업에서 배제했다면 정말 비극이다. 가능하면 정책적인 고려도 안하는 게 좋다. 되도록 심사위원들이 판단하는 게 맞다. 종합심사에서 판단할 수 있는 재량은 몇 개 주느냐, 어디까지 자격이 있느냐다. 특정 대학으로 쏠렸을 경우에는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형평성은 같은 해 뿐만이 아니라 예전 선정결과까지 보고 따져봐야 한다. 물론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만 수를 줄여서 준다는 것은 사업 취지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직접 심사에 참여했던 한 심사위원도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원래 4군데를 뽑으려고 하다가 왜 2군데만 뽑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옛 학진시절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전까지는 선정결과에 심사위원들이 평가한 심사결과가 100% 반영됐다. 이번에도 1,2차 심사 모두 엄격하게 상피제도를 적용하는 등 투명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갑자기 최종 선정결과에서 뒤집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정치적 고려를 자꾸 하다보면 학술연구지원기관으로써 독립성을 확보하기 더 어려워진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에 몸담고 있는 관계자들과 시각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국연구재단 한 관계자는 “인문사회 연구는 ‘선택과 집중’보다 분산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HK연구소를 한 개 선정하는 것보다는 그 예산 가지고 가능성이 있는 유망연구소를 많이 선정하는 게 좋지 않나”라고 소신을 밝혔다. 해외지역분야 HK 연구소를 6개 선정하기로 해놓고 4개만 선정한 이유다. HK연구소 2개에 배정할 예산으로 이보다 많은 유망연구소를 선정하겠다는 것이다. 1,2단계 심사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재량이 한국연구재단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다. 이전에 지원사업 선정과 평가를 담당했던 이들은 “1위는 탈락할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 학진 단장을 지냈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선정결과가 나올 때마다 말도 많고 소송으로 이어진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닌데, 함부로 그렇게는 못할 것이다. 종합심사에서는 심사가 공정하게 이뤄졌는지, 심사평가계획서대로 진행이 됐는지 확인하는 단계일 뿐이다. 연구재단 출범 이후에 시스템이 바뀌었을 수 있지만 순위를 뒤집을 수는 없다.” 

 

한국연구재단 쪽은 폭넓은 재량권을 주장한다. “교수들이 혼동하는 게, 종합심사에선 공고한 사업 목적과 부합되는지, 자격 요건을 다 따질 수 있다. 거기에 맞지 않으면 점수가 높더라도 탈락할 수 있다.” 또 다른 한국연구재단 관계자의 의견도 비슷하다. “규정에서 하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면 안 되나. 공문에 명문화하지 않은 것은 내부적으로 결정해 진행하면 안 되는가. 선정 가능권에 있는 10여개 팀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누구를 선정할 것이냐 문제다. 형평성과 균형을 고려한다. 신청자들이 충분히 인식할 수 있게 꼼꼼하게 알리는 것은 필요하지만 정부의 성격과 결부해 정치적인 고려로 선정을 잘못했다는 지적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연구재단의 해명에도 이번 탈락 결정은 물음표를 남긴다. 한 대학 교수는 이번 사건을  학문에 대한 정치 개입으로 확신했다. “민주사회정책연구원과 중앙대 독일연구소가 연이어 탈락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와 한예종 황지우 총장 등 일련의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학문이 엉망이 된다. 정권에 따라 학문이 정치 논리에 좌지우지된다면 제대로 된 학문 활동이 어렵게 된다.”

학계에서는 한국연구재단의 앞으로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단일 연구지원기관으로 거듭난 한국연구재단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마침 한국연구재단은 오는 15일 대전청사에서 재단의 비전을 공유하는 비전선포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박수선 기자 susu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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