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05:30 (일)
불화의 시대, 어떻게 미학의 정치성을 실현할 수 있을까
불화의 시대, 어떻게 미학의 정치성을 실현할 수 있을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9.12.07 17: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리뷰_ 겨울 계간지들의 시선

겨울 계간지들이 늦게 선보였다. 뒤숭숭한 계절의 착시 현상 때문일까. 이 착시 현상이 일과적인 것이라면, 내놓는 기획은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러나 겨울호 계간지들-<역사비평>, <오늘의 문예비평>, <창작과 비평>, <황해문화>가 내놓은 특집들은 일정 맥락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역사비평>과 <황해문화>는 각각 ‘불통시대에 돌아본 소통의 리더십’, ‘낡은 재현의 정치를 넘어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로’를 내걸었다. <역사비평>의 줄곧 모색해온 자기 정체성의 틀 안에서 던진 문제의식, 그래서 역사 담론 안에서 ‘소통’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황해문화>는 좀 더 현실 가까운 곳으로 닻을 내리려하고 있다. 구체적 현실 정치의 ‘장소’로 접근했다. 

반면, <오늘의 문예비평>과 <창작과 비평>은 특집에서 교감을 이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전자는 ‘2009년, 문학의 고통과 치욕’을, 후자는 ‘우리 시대 문학/담론이 묻는 것’을 각각 앞세웠다. 이들의 방향, 좌표 설정은 ‘문학과 정치’였지만, 접근은 미묘한 차이를 드러냈다. <오늘의 문예비평>은 ‘미학의 정치’를 통해 2009년의 문학을 개괄하려 했다면, <창작과 비평>은 ‘시의 정치성’을 소환함으로써 최근 전개된 시적 언어실험과 시의 정치성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큰 틀에서 본다면, 이들 계간지들은 서로에게 멀리 있는 듯 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의식하고, 보완할 수 있는 교감의 그물을 깁은 셈이다. 그 한 가운데 ‘정치’의 문제가 서 있다.

<역사비평>이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작금의 계절을 ‘불통시대’라고 규정한다. 흥미로운 것은 ‘疏通’의 전거를 조선시대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붕당정치, 당파싸움이 우선 떠오를텐데 이렇게 접근한 데는 ‘조선왕조의 정치 원리는 기본적으로 公論에 근거했고 소통을 중시했다’는 인식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이들의 말을 들어보자. “공론은 양반 지배층에 한정된 정치적 의사소통이었고, 사대부 양반들은 성리학 이외의 다른 이념을 용인하지 않는 폐쇄성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성리학을 현실에 적용하며 쌓은 무수한 경험의 축적과,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삶의 자세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성찰’을 동원해낼 수 있을까. <역사비평>은 세종, 조광조, 이이, 이순신, 정조를 통해 ‘소통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세종대의 정치적 의사소통과 그 기제」에서 “세종대의 공적 언어는 넓고 깊은 자유를 향유했고 세심한 배려를 받았다. 좋은 의견이 산림에 묻히지 않았고, 훌륭한 재능이 초야에서 썩지 않았다. 세종은 국가의 문제를 널리 물었고 말을 잘 받아들였으며, 그렇게 결집된 지혜와 대책을 심사숙고하고 극히 조심스럽게 국정에 활용했다. 세종 치세기에 잔혹한 정변이 한 번도 없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그의 이런 지적은 오늘날 한국 정치뿐만 아니라 언론과 국민, 지식인들 역시 성리학적 춘추대의의 화법에 익숙해져 있어서 이론적 당위성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고,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함으로써 이견을 ‘반도덕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경향을 염두에 둔 것이다. 

현실 정치의 발생학적 장소를 질문한 <황해문화>의 고민 역시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진보적 사유나 진보적 입장은 그 이론적 정당성과 명분에도 불구하고 왜 유의미하고도 효과적인 진보적 실천으로 좀처럼 전화되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에서 촉발”된 특집 ‘낡은 재현의 정치를 넘어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로’는 매우 낯익은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광일 성공회대 연구교수의 「민주주의, 재현, 정체성 정치들과 그 미래」와 신병현 홍익대 교수(경영학과)의 「통치의 장소에서 정치의 장소로: 민주노조운동과 새로운 문화정치」가 그 낯익음을 불러온다. 이광일은 민주주의 정치의 대의성이 지닌 근원적 모순을 파고들었다. 대변되지 못하는, 재현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민주주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반면, 신병현은 여전히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견지하는 가운데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운동들이 신자유주의 시기의 정치·이데올로기적 변화들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퇴행하거나 고립화돼 가는 원인을 찾고자 한다.                     

                
작금의 노동운동이 과거 1987년 민주화체제의 엘리트 중심의 가부장적 노동자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자기 공장 내부로 스스로 갇혀 들어가고 있다는 진단은 노동현장의 위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문으로 이어진다. “오늘의 노동운동이 평등과 민주주의의 대의에 의해 연대와 소통의 문화적 실천을 수행하며, 동일성의 억압을 거부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상을 문화적 재현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본다면, <황해문화>에서 흥미로운 글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특별기고 「한국의 진보적 지식사회와 지식인의 변형」일 것이다. 눈여겨 볼 부분은 ‘변형’이란 낱말이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변형이라는 말을 쓴 데는, 외부적 형태의 변화만이 아니라, 지식인 사회의 내적 구조, 그리고 지식인 개인의 내적인 지적, 정신적 면에 있어서의 변화를 표현하고자 한 말”이라고 그는 첨언했다. 그가 던진 주문은 아주 간단하다. “진보가 거듭나는 문제는 그들이 권력에 참여하고 그에 가까이 있을 때보다, 권력 밖에 있을 때 그 가능성이 더 크다.”

소통, 정치, 진보의 이름은 시와 문학에 고스란히 스며들어간다. <오늘의 문예비평>이 “한국 문학이 미학적 쇄신의 가능성을 넘어 정치적 윤전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이유”를 ‘민주주의적 가치가 붕괴되고 있는 비참한 상황’에서 찾는 것은 일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학적 인간에서 정치적 인간으로 전화’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탐색하겠다는 의도는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노어노문학과)의 「미학에서 정치로 넘어가는 고통의 역사에 대하여」에 집약돼 있다. 그는 작금의 한국사회를 ‘무통문명사회’라고 진단한다. 그 역시 ‘랑시에르’를 참조하며서 문학이 사회의 감성 구조에 개입할 수 있는 적극적 방식, ‘미학의 정치’를 신경숙과 박금산, 송경동과 이시백의 작품을 실제 분석함으로써 “쾌락이 고통을 억압하는 시대의 감성 분할에 대한 문학적 개입”의 의미를 이어갔다.

이득재 교수가 ‘랑시에르’의 감성의 정치를 문학에 도입한 것처럼, <창작과 비평>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랑시에르’를 비판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에서 이 노련한 비평가는 두 가지를 겨냥한다. 하나는 제목 그대로 ‘현대시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해부터 꾸준히 제기된 문학의 정치성 논의들을 교통정리하는 것이다. 이 중심에 용맹전진하는 신진들의 시작품이 놓여 있으며, 백 교수가 보기에 이 시작품이 지나치게 모더니즘으로 흘러 대중의 삶으로부터 혹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가 섞여 있다. 글의 말미에 남긴 구절, “자기 나름으로 치열했기에 곧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면 문학을 또다른 관념의 틀에 가두는 결과가 되기 쉽다. 특공대의 용맹은 존중하되 대중과 함께하는 좀더 다양한 공부와 사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에 이르면, 어느 순간 그 역시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분배’에 무게를 싣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