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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학문 선구가 된 이슬람 지성 … 이성주의 수립 노력이 ‘역사학’ 낳았다
근대학문 선구가 된 이슬람 지성 … 이성주의 수립 노력이 ‘역사학’ 낳았다
  • 노서경 서울대·서양사
  • 승인 2009.12.0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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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이브 라코스트, 『이븐 할둔-역사의 탄생과 제3세계의 과거』(노서경 옮김, 알마, 2009)

이븐 할둔이라는 대 사상가에 감히 다가가서 지정학자 이브 라코스트가 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우리말로 옮기는 ‘무리한’ 일을 하게 된 데는 사정이 있었다. 알제리전쟁을 좀 살피면서 보니, 아마 아무리 이 전쟁사와 1950년대 이야기를 들여다보아도 130년간 강대국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유혈 독립의 길을 종내 헤아리지 못하리라. 이건 뭔가 오랜 지난날과 연결되는 사태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마침 출판사에서 번역을 제의해, 일이 얼마나 어려울지 감을 잡지 못하고 하겠다고 했다. 또 하나 마음을 끈 것은 1998년 이 책을 (1966년의) 원본 그대로 재간행하는 저자의 서문이었다. 이미 1992년, 95년에 브뤼노 에티엔, 하산 레마운, 모하메드 하르비, 벤자민 스토라 등 프랑스의 마그레브 전문가들이 다수 나서서 지금 저기 지중해 건너 알제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을 비상하게 발언하고 있었지만 이브 라코스트의 서문 역시 호소력이 있었다. 저자는 ‘~주의’의 이름을 빈 과격성을 배격하고 필경 파리 북부 검은 동네들에서 실업과 좌절에 몰린 얼굴 다른 젊은이들의 장래를 놓고 어떻게 하면 이슬람 문화와 유럽 문화의 지적 ‘다리’를 인정하게 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것 같았다.    

14~5세기 ‘마그레브’의 보편 유산
이븐 할둔(1331~1406)이란 이름이 얼마큼 지금의 마그레브 젊은 세대에 살아 있는 유산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이븐 할둔의 정치 활동이 안달루시아를 넘나들었고 거기서 모로코의 페스는 직항로처럼 뚫려 있었으니 2006년 이븐 할둔 서거 600주년 기념학술대회가 그라나다에서 성대하게 열린 것은 당연했다. 이븐 할둔은 (중동 본 마당을 제외한 채) 마그레브 일대로만 보아도 분명, 보편 유산이 아닐까 싶다.

그뿐이 아니다. 이븐 할둔은 이 광활한 북아프리카 민족주의의 연원으로 추구됐다. 1896년 청년 튀니지의 민족운동 단체가 이븐할둔기념협회로 이름을 지었으며 그때 그 청년들이 품고 있던 민족주의란 쪼개진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를 의미하지 않았다. 되살려내야 할 하나의 큰 마그레브가 침공을 넘어 장래를 바라보는 그들의 ‘민족’이었다. 그 원대한 꿈은 1920~30년대의 압박적인 민족운동 속에서 성장하지 못했으나 1940년대의 수려한 알제리 지식인 알리 엘 함마미(Ali El Hammami)의 이상으로 부활하기도 했다. 이븐 할둔은 북아프리카 문명권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유럽의 전유인 듯한 근대학문의 선구적 위치를 갖는다. 김호동 교수의 번역으로 자세하게 읽게 된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은 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준다. 크나큰 보편사를 기획하고 그 서설에 불과한 『무카디마』, 혹은 『서설』(프롤레고메나)이 남은 것이지만 이븐 할둔의 저술은 방대하고 정밀하며 근대적인 구성력을 보였다. 결국 풍랑으로 가족을 다 잃고 외지인 카이로에 정착해 사법과 집필에 몰두하면서 이븐 할둔은 ‘세상을 모르는 학자’와 달리 부족과 부족의 생활방식, 도회와 산간-들밭의 삶의 구조, 이윤과 기술, 상업, 그리고 논리와 언어, 의술과 지식을 융합해 문명을 사유했다.

1960년대의 이브 라코스트는 이븐 할둔의 그 다문화 중에서 역사학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 『이븐 할둔』 이후 그의 학문적 도정은 지정학으로 옮겨가지만 알제리전쟁 속의 그는 제3세계의 과거에 관심이 쏠렸고 융성했던 문명의 현재의 쇠락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책 한 권을 옮긴 것으로 이브 라코스트가 본 이븐 할둔을 말할 수 없고 더구나 쟁점을 정리한다는 것은 삼가야 마땅한 일이다. 프랑스의 오리엔트 역사학이나 마그레브 전문 연구는 깊이 쌓여 있고 언어와 지리, 역사, 문화 전반의 광범한 분야가 개척됐다. 자크 베르크는 알제리의 프렌다에 기념도서관이 있는 언어와 문헌 전문가이며 역시 고문헌학자인 루이 마시뇽, 또 역사학의 샤를 앙드레 줄리앙, 샤를-로베르 아주롱, 또한 앙드레 망두즈는 식민 지배를 옹호하지 않고 독립적 주장을 학문화했던 대가의 이름들일 뿐이다. 알제리뿐 아니라 그보다는 한결 대접을 받았던 모로코와 튀니지 역사도 프랑스의 주류 역사학이 수용하는 분과 학문은 전혀 아니었으니 이들 역사가들의 외로운 작업은 선구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이브 라코스트가 공격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식민사관이라고 할 종류의 역사학이었다. 그 때문에 이 지역이 서구 강대국에 침범당하고 제압당했지만 비이성적인 문명도, 비문명적인 사회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한 증거를 이븐 할둔의 이성주의에서 찾고 또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며 성과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라코스트, 프랑스 주류 역사학에 도전하다
저자는 역사학의 탄생이 이븐 할둔의 이성주의에 빚지고 있다는 논리로 연결시킨다. 이 14세기 사상가가 신앙과 이성의 혼재 속에서 양자를 아우르면서 고유하고 확고한 이성을 밟아나가는 사유의 과정에 동참하려면 그의 험난한 삶의 역정을 먼저 보아야한다. 이븐 할둔은 두 차원의 세계를 살았다. 그의 육신은 하프시데 왕국과 메리네데 왕국, 그 사이의 부지 왕국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변천과 음모, 살해를 모두 겪고 원하든 원치 않든 콘도티에르로 정복과 침공을 지도하고 온갖 협상을 타결하고 산악과 요새와 수도원에서 칩거하지만 그의 꿈은 통일과 안정이 물질뿐 아니라 정신의 윤기를 뿜어냈던 알모라비데 제국과 알모하데 제국의 소생을 떠나지 않았다. 쇠락은 어디서 오는가. 이븐 할둔의 공격은 도시인에 쏠렸다. 사치에 집중하고 축적을 모르는 도시인들의 의식 구조와 생활은 검박하고 노동하는 미덕을 가진 산야 농촌 부족의 삶을 버린 것이다. 지형조건이 대규모의 수력 노동을 필요로 하면 주민들이 비무장, 무방비로 수력 권력을 장악한 지배층에 복종하지만 큰 강이 없는 이 지역에서는 산간과 평원의 부족 생활 구조가 군사 민주주의라고 할 동등성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문화의 원천이 도시를 일으키고 번영에 함몰하면 그만 깨지면서 아사비야(연대)는 실종되는 것이다.

196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아래 저자는 이 사회에서 계급 갈등이 완전히 첨예하지 않았던 것과 자본 축적의 미비를 이븐 할둔의 기술로부터 도출하고 있으며 어떻든 계속 부각되는 이븐 할둔의 그 말, 아사비야의 공동체적 가치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살아낸 경험을 토대로 하는 이븐 할둔의 이성주의 수립 노력은 이슬람의 학식과 지성 전체에 경외의 심정을 갖게 하고 그 문명을 재인식, 인지해야만 한다는 자각을 주었다. 이븐 할둔을 태어나게 한 것은 비단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은 그처럼 광활하지만 몰락의 어지러움 속에 갇혔던 수많은 숨은 지성이었을 것이기에 더구나 그렇다.

노서경 서울대·서양사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를 지냈다.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장 조레스, 그의 삶』 등의 저역서가 있다. 서울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문화’ 연구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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