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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문학의 죽음에 대해 과잉진술 하고 있는가
누가 문학의 죽음에 대해 과잉진술 하고 있는가
  • 조영일 문학평론가
  • 승인 2009.11.30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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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교수의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사회와 역사>83집)을 읽고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사진)‘근대문학의 종언’ 테제가 학문간 경계를 넘어 사회학 분야에서도 성찰의 시선을 낳고 있다. 한국사회사학회가 발행하는 <사회와 역사>제83집(2009년 겨울)에 실린 김홍중 대구대 교수(사회학)의 글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그것이다. 김 교수의 논지를 정리하고, 이에 대해 가라타니 고진 번역과 근대문학 종언론 해석을 다채롭게 진행한 조영일 문학평론가의 리뷰를 게재한다.
                          
  이 논문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 종언론‘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첫째, 근대 문학의 기원에 대한 헤겔, 보들레르, 블랑쇼 등의 논의들을 재검토함으로써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이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 성립되는 근대문학의 성찰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힌다.

  근대문학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죽음과 불가능성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성찰로 구성돼 있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근대문학의 내부에 내포돼 있는 구성적 개념이다.
  둘째, 문학적 주체에 관한 탐구를 통해서, 가라타니가 죽음을 선포한 문학은 사실 문학적 주체뿐 아니라 근대 정치의 저항적 주체를 구성하는 장치인 진정성의 죽음에 내포된 현상임을 밝힌다. 이런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문학의 죽음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의 죽음을 내포하는 진정성의 죽음이다. 진정성 에토스의 사회적 소멸은 단순히 문학의 죽음뿐 아니라 저항정신의 쇠퇴, 인간과학과 사회과학적 지식의 위기, 그리고 주체적인 삶의 형식의 소실을 가져온다. 그것은 문학, 정치학, 윤리학, 미학 그리고 사회학의 공동운명이다.

  이처럼 포스트-진정성의 시대의 도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문학의 운명에 대한 성찰과 연결되지 않을 때 문학의 죽음을 선언하고 그 외부로 나가려는 가라타니의 몸짓은 공허한 시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김홍중, 「근대문학 종언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사회와 역사> 제83집.


 

지난 100년간의 한국근대문학사를 되돌아보면,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만큼 인구에 회자된 글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와 관련해 가장 많은 문제제기를 하고 또 가장 많은 글을 써온 사람 중 한명인데, 그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 중 하나는 많은 평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물론 그것은 ‘종언’이라는 단어에 대한 집중(집착)과 관련이 있다. 최근 <사회와역사> 83집에 실린 김홍중 대구대 교수의 「근대문학의 종언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고 생각된다. 몇 달 전 나는 <교수신문> 지상에서 ‘학문의 식민성’을 둘러싸고 하정일 원광대 교수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가라타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종언’에 대한 비평의 페티시즘
무엇보다도 가라타니 스스로가 자신의 테제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 않다. 사실 그런 ‘의미부여 자체’가 어떻게 보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와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한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말고 있다. “나는 문학이 끝났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근대에 문학이 지나치게 중요하게 취급됐는데, 그런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 그 정도의 이야기로서 뭔가 특별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다. 첫째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문학에 대한 ‘지나친 의미부여’의 소멸을 의미할 뿐이며, 둘째는 ‘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특별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 ‘종언론(묵시록)’에 대한 검토나 그것이 가진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는 것은 문제의 본질로부터 한참 멀어지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작 진짜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비평은 ‘종언론’과 ‘오리지널리티’에 집착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해, ‘단적인 사실’을 앞에 놓고서 역사철학이나 존재론으로 우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진정으로 테제의 핵심과 대결하기 위함일까. 아니면 부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에 대한 과잉반응일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런 우회가 ‘역설적이게도’ 해당 테제를 둘러싼 담론을 ‘과잉’생산되게 만들었고(정작 일본에서는 우리만큼 논의가 되지 않았다), 바로 그 과정에서 그 테제가 본래 갖고 있던 구체성이 조금씩 제거돼 왔다는 점이다.

명백한 사실에 대한 외면과 더불어 자연스레 증가하는 것이 바로 수사(방어로서의 과잉표현)인데, 그것은 보통 특정부분에 집착(페티시즘)하고 그것을 증폭시켜 현실과의 고리를 느슨하게 만든 후 추상적인 차원에서 전체를 배제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사실 국내의 많은 비평가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가라타니를 비판했는데 그래서일까,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된 글들이 꽤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문제의 핵심은 회피한 채로 화려한 수사와 박식함을 과시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김홍중 교수는 크게 ‘두 가지 상이한 차원’에서 가라타니를 비판하고 있다. 우선 그는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근대문학의 ‘죽음(부정성)’으로 간주한 후, “근대문학은 본래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데, 가라타니가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과잉진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일종의 동어반복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근대문학은 죽음에서 나왔다!), 사실상 ‘죽음에서 파생된 근대문학’이라는 원론(또는 일반론)으로 수렴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동어반복은 어디까지나 헤겔, 보들레르, 벤야민, 블랑쇼를 경유해 도달한 김홍중 교수 자신의 것으로, 결국 이를 통해 그가 지적하는 것은 가라타니와 유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이 이전에도 많이 있었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김홍중 교수의 이런 주장이야말로 지난 몇 년 동안 지겹도록 반복된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해, 그는 사실상 그동안 가라타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온 문학주의 비평가들의 논리(‘종언’에 대한 페티시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다른 점이라면 인용되는 외국사상가나 문헌이 조금 다를 뿐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야말로 과잉진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장의 선후(또는 오리지널리티) 따위가 아니라, 무엇이 그로 하여금 반복(과잉진술)을 하도록 만들고 있느냐에 있다.   

둘째로 그는 20세기 후반에 소멸한 것은 근대문학보다는 ‘진정성이라는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가라타니가 과소진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행위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가라타니가 ‘문학 바깥에서 찾는 진정성’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기묘한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가라타니의 주장 자체가 (그 역시 지적하는 것처럼) 사회적 변동 하에서 이루어지는 예술적 가치의 변화에서 나온 것인데, ‘갑자기’ 그의 문학 부정을 ‘이전에 문학에 존재했던 진정성’을 찾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가 최근에 발표한 「카프카와 손담비」(<문학동네> 2009년 가을호)라는 글에서 노무현의 죽음을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에서 사후적으로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기발한’ 논리적 착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발한 논리적 착종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두 가지 차원이 따로 따로 이야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사실 그의 가라타니 비판이 두 가지 차원 모두에서 자기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은, 원래는 하나인 논제를 억지로 구분해 그것을 ‘문학에 대한 믿음’으로 정당화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첫 번째 차원이 문학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고, 두 번째 차원이 사회학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 할 때, 두 차원은 대등한 관계라기보다는 후자가 전자에 포섭되는 형국이다.

김홍중 교수는 사회학자로서 핵심문예지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어떤 경위로 편집위원에 위촉됐는지는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국문학과 중심의 한국문학판에 비판적이었던 나로서는 매우 환영할 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번 글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이 꼭 환영할 만한 사건인지는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글은 굳이 그가 쓰지 않더라도 한국비평계에서 부지기수로 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문학에 필요한 사회학은 이론분석으로 포장된 멋들어진 ‘사회학문학’이 아니라 현실분석에 기반해 반문학적으로 씌어진 ‘문학사회학’인데, 적어도 후자의 입장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문제를 가라타니(그리고 헤겔, 보들레르, 블랑쇼)에게로 소급해 해결하려는 반사회학적(지극히 문학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가라타니의 과잉진술이나 과소진술이 아니라 한국비평의 과잉진술과 과소진술이며, 바로 그런 점에서 사회학이 한국문학을 위해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 후자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필자는 <문예중앙>을 통해 비평활동을 전개했다.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등의 저서와 『근대문학의 종언』, 『네이션과 미학』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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