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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공간’ 분석 통해 건축사의 사각지대를 탐색하다
‘상징공간’ 분석 통해 건축사의 사각지대를 탐색하다
  •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건축학
  • 승인 2009.11.23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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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우리 궁궐은 어디로 갔을까

2009년 11월초에 필자가 대표저자로서 낸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우동선 외 지음, 효형출판)을 통해서 발표한 「창경원과 우에노 공원, 그리고 메이지의 공간 지배」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그 내용은 창경원으로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의 건립 과정을 이토 히로부미의 행적에 주목하면서 우에노 공원의 성립 과정과 비교해 분석한 것이다.

이 글은 창경원의 성립 과정이 곧 창경궁의 붕괴 과정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붕괴 과정에 대한 관심은 필자가 恩師 스즈키 히로유키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빅토리안 고딕의 붕괴 과정 연구」(1984)의 제목을 본 1996년쯤부터 가져왔다. 생성 과정이나 성립 과정이 아니라 붕괴 과정을 주제로 삼은 이 논문의 제목이 당시의 내게는 시사하는 바가 무척 컸다. 이후 필자는 근대 건축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성립한 것이 아니라, 이전 시대가 붕괴된 터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과 근대의 拮抗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곳이 궁궐이라고 보았고, 궁궐 가운데 창경궁을 잘 살펴보고 싶었다. 이즈음에 우에노(上野)에서 쇼기타이가 메이지 정부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렀음을 알았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이란 하나의 볼거리로 만든 데는 신성한 것의 훼손이란 전략적 의도가 작용한다. 오늘날의 창경궁 명정전과 1953년 창경원의 모습(왼쪽). 소풍나온 여학생들이 몰락한 왕조터에 서 있는 풍경 속에는 궁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을 하던 중에 광화문 교보문고 일서부에서 책을 고르다가 李成市 교수의 논문을 보게 됐다. 「조선왕조의 상징공간과 박물관」이라는 제목의 그 논문은 『식민지의 시좌 -조선과 일본』(2004)이라는 책에 수록돼 있었다. 그 자리에서 ‘앗’하고 머리를 망치로 한 대 크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로 경복궁의 변화와 박물관의 성립을 다룬 것이지만, 상징공간에 대한 시각은 내 생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창경원과 우에노 공원


내 생각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안도감과 선수를 뺏긴 것 같은 상실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바로 구입해서 집으로 왔다. 얼마 후에 이 책이 우리말로도 번역(2004)된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일본의 도시사 관련 연구서들로부터 에도(江戶)에서 메이지로 바뀌면서 일본의 여러 성곽들이 훼철됐음을 알았다. 메이지 유신에 반대한 영주들의 성곽이 더욱 철저히 파괴됐다. 메이지의 성곽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성곽을 다룬 논문으로 오타 히데하루의 「근대 한일양국의 성곽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정책」(2003)을 찾을 수 있었다. 그밖에 송기형, 목수현, 박계리, 박소현 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주로 박물관 제도의 성립과 관련해 발표한 선구적인 논문들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그러다가 창경원과 우에노 공원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싶어서 우에노 공원과 일본공원사에 관한 서적들을 주문하기 시작했고, 우에노 공원을 답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건축사의 선행연구들은 궁궐은 궁궐대로, 박물관은 박물관대로 다뤄서 양자의 교점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건축의 역사가 전통과 근대를 비교적 엄격하게 분리해 다뤄왔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일 것 같다. 전통 시대 연구자는 비교적 순수한 전통 건축을 강조하려 하고, 근대 연구자는 비교적 충실한 근대 건축을 찾으려고 한다. 日帝下는 자주적인 근대가 아니었고, 없어진 궁궐 건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까지 남아있는 궁궐 건축도 대체로 변형과 왜곡을 일정하게 거쳤다. 그래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의 궁궐은 전통 시대의 연구자나 근대 연구자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일종의 건축사의 사각지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각지대에 대한 연구서, 곧 여러 궁궐의 붕괴 과정을 다루는 책을 언젠가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필자는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박성진의 예술전문사 학위논문의 주제를 궁궐의 변용으로 삼으라고 지도했다. 이 무렵에 창경궁의 문화재 안내문안을 검토하는 일과 대온실의 실측조사에 참여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2007년에는 필자 주변의 건축사가들에게 이러한 책의 기획을 알리고 동참을 구했다. 이 책의 공동필자들은 전공하는 시대와 장르는 조금씩 다르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의 궁궐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논문을 발표해온 분들이었다. 그 결과 총 8명이 필진으로 참여했고,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에 실린 개개 논문들은 크게 3개의 주제로 나뉠 수 있었다. 곧, 황권 강화를 위한 대한제국의 노력과 좌절, 일제에 의한 조선 궁궐의 수난사, 그리고 조선의 궁에 들어선 근대건축물이다.

볼거리로 전락한 왕조의 성역
그러나 정작 내 논문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현상이 유사하다는 심증은 더 했지만, 창경원과 우에노 공원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고리를 잘 찾을 수 없었다.

첫째, 창경원에는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이 다 들어선 반면에 우에노 공원에는 박물관과 동물원은 있는데 식물원은 없다는 점이 스스로 잘 설명되지 않았다. 둘째, 창경원과 우에노 공원에 다 관계하는 인물이 있다면 설득력이 더하겠는데, 그게 누군지 금방 알 수가 없었다. 이 두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당시의 자료와 회고록, 그리고 다른 연구서들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세키 히데오의 『박물관의 탄생』(2005)에서는 우에노 공원에도 식물원을 설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의 순행에 관련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라 타케시의 『가시화된 제국 -근대일본의 行幸啓』(2001)는 제목 그대로 순행이 근대일본의 가시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이후에는 당시의 일어 잡지 <조선>과 <조선과 만주> 등에서 자료를 찾았다. 

내 논문이 전하는 주장은 간단하다. 우에노는 에도 시대 쇼군의 사당과 보리사가 들어선 성스러운 공간이었는데, 메이지 정부는 여기에서 박람회를 개최하고 박물관과 동물원을 세웠고 묘지도 조성했다. 창경원 역시 궁궐이라는 성역이었고, 일제는 여기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세우고 벚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우에노 공원과 창경원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것이다.

이토는 우에노 공원에서는 총리로서 미술학교와 박물관의 설치에 관여했고, 창경원에서는 통감으로서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의 설치에 관계했다. 퇴위한 순종의 위안을 위해, 세인에게 취미와 지식을 공급하기 위해 창경원을 만들었다는 선전은 명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이토 히로부미 등이 메이지 시대에 우에노에서 진행한 공간 지배가 창경원에서도 놀랍도록 유사하게 전개됐고, 그 전개가 창경궁을 形骸化하는 일이었음을 확인했다. 이때 없어진 전각들은 세키노 타다시 등이 보존의 가치가 낮다고 평가한 것들이었다. 창경궁에서 어떤 전각들이 없어졌는가는 알 수 있지만, 없어진 전각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이 책의 다른 논문들에서는 경복궁, 경희궁, 원구단, 풍경궁에서 없어진 일부 전각들의 행방을 찾아서 밝혀 놓았다.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건축학

일본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옮긴 책으로 『서양 근·현대 건축의 역사』등이 있다. 2006년 미국 건축역사학회 연례회의 펠로십을 공동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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