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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⑭ 거머리]우생학의 도사, 당뇨병 치료에도 쓰고 범인도 잡는다
[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⑭ 거머리]우생학의 도사, 당뇨병 치료에도 쓰고 범인도 잡는다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09.11.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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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알다시피 여기에 글 쓰는 사람은 경남 산청의 안쪽 땅, 지리산자락에서 자란 깡 촌놈이라 벼논도 많이 맸다. 어른들 뒤꽁무니를 어슬렁어슬렁 따라다니며 논바닥을 훑고 다니는데 장딴지가 근질근질 가려온다. 만지는 순간 손끝에 느껴오는 물컹한 그 무엇에 등골이 오싹하고 께름칙하다. 아! 거머리로구나, 자주 당해 봤기에 퍼뜩 알아차린다. “오늘 또 재수 옴 올랐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체 없이 논두렁으로 나가 덥석 풀 한줌 뜯어 다리의 흙탕물을 쓱쓱 문질러 닦고, 조심스럽게 홱 거머리를 잡아떼어든다. 요놈을 그냥 둘 수 없다, 원한의 복수를 해야지. 보통은 돌멩이로 콩콩 찧어버리지만 장난기가 동하면 뾰족한 나무꼬챙이로 똥구멍을 푹 끼워 햇볕 쨍쨍 내려 쪼이는 곳에 곧추세워둔다. 惡童이 따로 없다. 이 모질고 끈질긴 놈이 뙤약볕에 며칠을 둬도 꼼작꼼작 죽지 않는다. 

아직도 다리엔 유혈이 낭자하다. 거머리의 침샘에서 분비한 항응고효소물질인 ‘히루딘’이 피 굳기를 억제하기에 거머리에 물린 자리에는 한동안 피가 멎지 않으며, 히루딘이 피에 다 씻겨나간 뒤에라야 출혈이 끝난다.

지긋지긋 끈덕지게 착착 달라붙어 남을 괴롭게 구는 사람을 ‘거머리 같은 놈’이라고 한다. 아무튼 거머리는 지렁이나 갯지렁이와 함께 몸에 고리(環)를 여럿 가졌으니 環形動物이고, 그 중에서도 거머리강(Class Hirudinea)에 든다. 그리고 種이 달라도 모두 몸마디가 34개이며, 특별나게도 딴 환형동물에는 없는 3~5쌍의 눈이 있고, 두 개의 앞 빨판(6번째 몸마디에서 만듦)과 뒤 빨판을 갖는다. 거머리는 세계적으로 500종이 넘으며 대부분 민물에 살지만 땅이나 바다에 사는 종도 많이 있어서, 열대지방의 나무에 사는 ‘땅거머리’는 보통 때는 새나 짐승의 피를 빨지만 사람을 만나면 다짜고짜로 공격한다고 한다(숙주에 달라붙은 지 30분 이내에 거머리는 몸무게의 10배에 해당하는 피를 빪). 이들은 암수한몸인 자웅동체이면서도 반드시 짝짓기를 해 精子를 서로 맞교환하며 卵生하는데, 自家受精하면 시원찮은 자식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먼저 알고 있었던 優生學의 道士다.

징그럽게만 여겼던 거머리가 이런 쓰임새가 있을 줄이야! 이 세상에 필요 없이 태어난 것은 없다더니만, 다 제 할 몫을 한다는 말씀. 그리스, 로마시대에도 鬱血症(혈관의 일부에 정맥성 혈액이 고임)에 피 빨리기로 썼지만 현대의학에도 거머리치료가 각광을 받고 있다. 손발가락이 절단되면 접합수술을 하는데, 힘들여 잘 해도 일부 혈관이 끊겨있어 피가 잘 돌지 않아 患部가 퉁퉁 붓게 된다. 여기에 ‘석 달간 피에 굶주린’ 거머리를 갖다 대면 녀석이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피를 빤다. 이리하여 부기가 빠지면서 상처가 아문다고 한다. 국산 거머리는 크기가 작을뿐더러 빠는 힘도 약해 안 쓰고, 덩치가 2배나 더 큰 영국산(Hirudo medicinalis, 최대 길이 8~9㎝)을 쓴다고 하며, 의료용 거머리는 무균상태에서 일부러 키우며 값도 꽤나 비싸다고 한다. 또 거머리는 당뇨병이나 혈관기형으로 인한 발가락 궤양, 피부 궤양, 혈관염증 치료 등에도 쓴다고 한다. 이런 된통 걸렸다. 거머리를 범죄의학에도 쓰니, 배속의 피(DNA)를 분석해 犯人을 잡는다.

그러면 그들은 거머리를 어떻게 채집했을까? 그렇다. 거머리가 사람의 피 냄새를 맡고 온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이다. 녀석들은 무논에서 일하느라 철벙철벙 물장구에서 생기는 물의 波動을 느끼고 온다. 그러니 물에 들어갈 필요 없이 밖에 퍼질고 앉아 장대로 찰싹찰싹 물 등짝만 두들기면 할랑할랑 댓잎 같은 것이 몰려온다. ‘양성(+)주파성(陽性走波性)’을 이용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몸뚱이를 쓰지 말고 머리를 쓰라 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40년이 넘게 지난 옛날, 서울의 수도여고에서 교편 잡을 때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이른 봄에 걸스카우트 학생들이 신다 해진 스타킹을 열심히 모았으니, 그것을 거머리 예방용으로 썼다. 거머리는 나일론스타킹을 뚫지 못한다. 어쨌거나 이제 와선 殺蟲劑, 除草劑 탓에 덩달아 거머리도 씨가 말라간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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