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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영혼을 펜 끝에 내걸기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영혼을 펜 끝에 내걸기
  • 권성우 서평위원/숙명여대·국문학
  • 승인 2009.11.23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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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우 서평위원/숙명여대·국문학

『낭만적 망명』이란 비평집의 제목 ‘낭만적 망명’은 E.H.카(Car)의 『낭만적 망명자』(The Romantic Exiles, Serif, 2007, London: First published 1933)에서 착안한 것이다.

E.H.카는 이 책에서 알렉산드르 게르첸·니콜라이 오가료프·미하일 바쿠닌 등의 러시아 혁명 이전의 차르 체제에서 유럽으로 망명해 파란만장한 혁명운동에 매진했던 인텔리켄치아 그룹을 ‘낭만적 망명자’라고 칭한다. E.H.카에 의하면 도덕적 열정, 불행한 가족사, 역사적 환멸, 낭만적 투쟁, 새로운 독단 등등으로 점철된 그들의 험난한 歷程은 생전에 혁명의 결실을 보지 못한 채 결국 비극으로 마감됐지만, 그 후에 전개된 역사 속에서 그들은 고유한 자신들의 자리를 지닐 수 있었다고 한다.

예컨대, 게르첸 사망 50년 후, 모스크바의 한 대로에 그의 이름이 붙여지는 과정을 통해 게르첸은 러시아혁명의 선구자로 추앙받았으며, 혁명적인 청춘의 범례에 대한 예찬을 위해 모스크바대학 구내에 게르첸과 오가료프의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E.H.카는 『낭만적 망명자』에서 게르첸 등의 낭만적 망명자들과 마르크스를 대비해 설명하고 있다. 낭만적 망명자들은 그야말로 이상주의적이며 낭만적이었다. 그들에게 혁명의 요인은 직관적이며 영웅적인 충동(intuitive and heroic impulse)의 문제였다. 그에 비해 마르크스는 냉철한 이성과 자명한 필연성을 강조했다(The Romantic Exiles, Serif, 2007,pp.320~321). 개인적으로 『낭만적 망명자』와 이사야 벌린의 『러시아 사상가』(조준례 역, 생각의나무, 2008)를 접하면서 특히 게르첸의 인생과 사상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물론 지금 우리 시대에 19세기의 낭만적 망명자들의 감성이 그대로 적용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초거대기업과 거대보수언론, 새로운 퇴행적 정치권력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강고하게 결합된 이 시대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과 지혜로운 현실 판단력이 요청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학을 둘러싼 현실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뉴미디어와 대중문화, 현대적 일상성에 포섭된 이즈음의 문학은 19세기의 저 낭만적 망명자들이나 1980년대의 진보적 문인들이 밟아갔던 길과는 현저하게 다른 맥락의 갱신된 문제의식을 요청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모순에 눈뜨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흐름에 거슬러’ 새로운 이상과 대안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낭만적 망명자들의 문제의식이라면,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시대야말로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충전된 낭만적 망명자들의 존재가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출판자본과 미디어공화국에 순치돼버린 이 시대의 문학적 현실을 낭만적으로 돌파하는 순정한 이상주의자들이 오히려 지금 이곳의 문학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때로는 냉철한 이성보다 낭만적 열정이 지난한 현실을 한 순간에 돌파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들 냉정할 정도로 실제적 권력과 중심을 좇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는 승산이 없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끝끝내 그 길을 가는 낭만적 망명자들의 존재가 사무치게 그리운 이유가 무엇일까. 이 비평집에서 다룬 임화, 에드워드 사이드, 가라타니 고진, 최인훈, 서경식 등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낭만적인 망명자’의 초상을 인상적으로 보여준 바 있다.

문제는 ‘형혼을 펜 끝에 내걸었다’고 표현할 만큼 치열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낭만적 망명자들의 문제의식을 철지난 것으로 치부하는 이 시대 지식사회의 현실이다. 가령 평단을 예로 들어보자. 편향적인 문학제도와 그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냉소주의라는 탈근대적 질병에 전염된 채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작품의 미학적 질과 전혀 상관없이 텍스트만을 경배하는 제도적 차원의 비평이 득세하고 있다. 이른바 주류 평단의 시스템과 맞서고자 하는 낭만적 망명자들(비평가)은 점점 고립되고 있다. 이제 비평은 시대와의 싸움, 시스템과의 대결을 방치한 채, 이 시대 문학의 번성을 추인해주는 일종의 현란한 테크닉 내지 코디네이션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나만의 주관적 생각일까.

■ 이 글은 권성우 교수의 『낭만적 망명』(소명출판, 2008)에 수록된 글의 일부로 필자의 동의를 얻어 발췌 게재합니다. 

권성우 서평위원/숙명여대·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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