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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과 조봉암과 進步黨] 정통성 확립 위해 사면 복원
[4·19 혁명과 조봉암과 進步黨] 정통성 확립 위해 사면 복원
  • 교수신문
  • 승인 2002.04.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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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2 14:44:18
4·19는 해마다 돌아오지만 42년 전 1960년의 4·19 혁명의 저류를 흐르는 기본정신은 충분하게 인식되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5·16 군사 쿠데타를 시발점으로 하는 30여 년에 걸친 군사통치와 그에 영합하는 보수정치세력에 의해서 그 참뜻과 그 진가가 가려져 왔기 때문이다.

달리 말한다면 4·19는 이승만-이기붕의 3·15 부정선거를 그 폭발점으로 하였으나 그 밑바닥에는 “민족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축으로 하여 이승만과 보수야당을 자처하고 있던 민주당에 대항한 조봉암과 진보당의 활동”이 깔려 있었으며 “4월 민주항쟁 이후의 민족민주운동은 조봉암과 진보당의 정치노선을 계승한 것”(조봉암 연구)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 차원의 복권 운동 활발

1956년 5월의 제3대 대통령 선거 때 대통령에 입후보한 조봉암 후보에게 귀중한 한 표를 던진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1960년 4·19 대열에 동참한 4·19 민주화 혁명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뜻을 같이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조봉암과 진보당을 4·19 혁명과 連繫짓고 아울러 그 명예회복과 사면·복권을 서둘러 호소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그러한 노력은 끈질기게 이어져 왔다. 1991년 노태우 정권 때 전·현직 두 김 대통령을 포함한 여야 국회의원 86명이 13대 국회에 ‘죽산 조봉암 선생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에 서명하고 그것을 토대로 대통령이 그 청원을 실행토록 계획하였으나 임기에 쫓겨 법사위에서 심의조차 못한 채 폐기되고 말았던 일이 있었다. 정부차원이 아닌 민간차원에서는 조봉암과 진보당의 명예회복을 위한 모임이 최근 들어 두 차례 있었다.

그 첫째는 1999년 3월 25일 ‘죽산 조봉암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대토론회―죽산 조봉암 선생의 평화통일론과 개혁론의 재조명’이라는 이름의 모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죽산 조봉암의 사면·복권을 위한 서명서에 모두들 서명했다. 또 그 자리에서 (내가 학생 때) 신문에 실린 이승만-이기붕을 향한 ‘歎願書’를 통해서만 알았던 曺 晶 여사(죽산 조봉암의 큰 딸)도 만날 수 있었다. 이어서 1999년 7월 3일 죽산 조봉암선생 추모사업회 주최로 ‘조봉암 선생 탄생 100주년,서거 4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움’이 ‘한국현대사와 조봉암 노선 : 민주주의·균등경제·평화통일’을 주제로 열렸다. 그리고 총 6권으로 된 정태영, 오유석, 권대복이 펴낸 ‘죽산 조봉암 전집’출판 기념회가 열렸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음에 반하여 문민정부의 첫 출발인 김영삼 정부 때나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현 김대중 정부에서나 똑 같은 침묵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봉건왕조에서도 억울한 누명을 사후에라도 씻어주는 신원제도가 있었음을 감안할 때 조봉암과 진보당의 경우에도 그 누명을 벗기는 일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어지는데 시사성있는 사안(시국사범들의 사면,복권,이인모 노인의 북송, 장면 전 총리에의 건국공로훈장의 수여, 박정희 기념관의 건립에 대한 국고보조 등)만이 처리되고 죽산 조봉암의 사면,복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의 정치구도가 지역에 기반을 둔 보수적 붕당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역의 표를 의식한 눈치보기의 정치형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는 더 이상 계속돼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 우리 내부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외부에 대하여 지켜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진보와 보수의 진정한 화해

프랑스의 사회당 당수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팡테옹(국립묘지)으로 옛 사회당의 원조 ‘블룸(Blum)’의 묘를 찾아 참배하는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미테랑 대통령이, 프랑스의 사회당 정권의 출범을 염려해 프랑스를 방문한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옆에 세워 놓고 “프랑스는 프랑스다(La France c’est la France)”라고 민망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는 광경은 더욱 더 인상적이었다. 우리도 브란트, 블레어 그리고 만델라에 관해서 말하기에 앞서 우리 나라 사회민주주의 정당사에서 원조에 해당하는 조봉암과 진보당에 관하여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국립묘지로 그를 참배할 날이 오도록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김대중 대통령이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더욱더 그 힘과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남과 북, 북과 남이 각각 (또는 우리 남쪽만이라도) 극단적인 교조주의(生)를 포기하고 통일의 모델로서 스웨덴형 복지국가, 즉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의 혼합형 복지국가를 지향할 때 비로소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통합은 쉽게 이뤄 질 수 있을 것이며 동양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동방의 빛’에 나오는 시구―”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와 같이 ‘통일된 코리아’는 아시아의 그리고 세계의 진로를 밝혀 줄 등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한 이승만 대통령과는 반대로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게 하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한 죄’로, 그리고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죽임(즉 법살)을 당한 조봉암과, 공식집계상으로는 2백16만여 표였으나 (4·19 직전의 부정선거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그에게 사실상의 당선권의 압도적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명예를 우리 모두의 힘으로 회복시키자. 그리고 보수의 테두리에서의 진보와 보수라는 이기적인 대립이 아닌 혁신과 진보를 언제나 전제로 하는 진보와 보수의 상호보완적 정치구도를 이 땅에 실현시키자.

보수의 테두리에서의 진보와 보수라는 이기적인 대립이 아닌 혁신과 진보를 언제나 전제로 하는 진보와 보수의 상호보완적 정치 구도를 이 땅에 실현시킬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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