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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레닌과 그의 친구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레닌과 그의 친구들
  • 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교·정치학
  • 승인 2009.11.0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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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교·정치학
한국의 급진적 사회운동세력들이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V. Lenin)이 1902년 발표한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읽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였다. 한국사회의 변혁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라는 고민이 1980년대 한국에서 1900년대 초반의 러시아의 레닌을 불러오게 했을 것이다. 레닌의 그 책자는 1901년에 발표된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라는 논문을 확대한 것이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국적 정치신문’을 위한 계획을 제안했다. 그 신문의 역할은 ‘집단적 조직가’였다.

만약 레닌이 21세기를 살았다면, 자본과 권력의 영향 아래에 있는 방송과 신문을 보며, 자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매체인 인터넷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는 신문이 아닌 인터넷을 '매개'로 혁명담론의 허브(hub)를 만들 생각을 했을 것이다. 네트워크 및 웹생태계에 대한 물리학적 연구인 바라바시(A.L. Baraba、si)의 『링크』(Linked: The New Science of Networks)를 보며 레닌을 떠올렸다.

『링크』에 따르면, 웹생태계와 같은 네트워크에는 극히 많은 링크를 갖는 소수의 허브들이 존재하고, 소수의 링크만을 갖는 노드(nodes)가 매우 많은 멱함수(power function) 분포를 가지고 있다. 웹생태계에서는 “성장(growth)과 선호적 연결(preferential attachment)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 대개 허브와 멱함수 법칙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새로이 만들어진 노드가 “어디를 링크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이미 많은 링크를 갖고 있는 노드를 선호”할 경우 만들어지는 결과다.

이 멱함수 연결선 수 분포를 『링크』는 ‘척도 없는(scale-free) 네트워크’로 부르고 있다. 고유한 척도를 가지는 무작위 네트워크와 달리 척도 없는 네트워크에는 “전체를 특징짓는 노드(characteristic node) 같은 것은 없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에는 “희소한 허브에서부터 많은 작은 노드들에 이르기까지의 연속적인 위계가 있을 뿐이다.” 불굴의 혁명가 레닌에게는 노드별 링크 수도, 불평등한 부익부 빈익빈의 척도 없는(scale-free) 네트워크의 실재도 실망의 사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혁명을 꿈꾸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불평등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레닌과 그의 친구들은 『링크』가 그리는 세상을 보며,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담론의 허브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담론의 생태계에서 그들이 만든 노드의 링크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정치사업을 수행하면서, 언젠가는 다가올 ‘사건의 시간’을 통해 담론의 생태계에서 힘의 분포를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임계점’(critical point)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러시아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그 임계점이 컴퓨터 운영체제를 독식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같은 노드를 만들게 됐을 때의 위험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 정도의 반성을 할 충분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혁명을 꿈꾸면서 불평등한 구조가 전환될 수 있는 임계점을 대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임계점을 넘은 것처럼 보이는 ‘촛불시위’가 등장했을 때, 그들은 경악했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대중의 자생성과 사회민주주의자의 의식성’이라는 이분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촛불에는, 전위와 대중, 지식인과 민중, 활동가와 시민의 구분이 없었다. 레닌과 그의 친구들이 조직적인 선전·선동을 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촛불의 주범이라고 나설 수도 없었고, 누구도 그들을 주역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촛불의 흐름을 지도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과 그의 친구들의 노드가 아니라 어떤 이념도 담을 수 없는 텅 빈 공간인 아고라에서, 자신들의 노드와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링크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다양한 취미를 즐기는 노드들이, 촛불이라는 창조적 사건(emergence)을 만들고 있음을 보며, 그저 웃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촛불이 국가권력의 장악이라는 혁명의 목표에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보며, 쓸쓸히 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몸에 밴 반성과 총화의 습관 때문에 레닌과 그의 친구들은 다시 모였을 것이다. 촛불의 생성·소멸의 전 과정을 복기하며, 그들이 기다려 온 임계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결정적 임계값을 상회할 정도의 바이러스”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에서는, “바이러스가 비록 전염성이 약한 경우라도 얼마든지 확산되고 또 살아남게” 되고, 그 네트워크에서는 임계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해졌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척도 없는 네트워크에서는 “허브가 지배력을 행사”하지만, 그 허브는 모순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다양한 노드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연과 무작위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 그들의 가장 큰 수확이었을 것이다.

구갑우 서평위원/북한대학원대학교·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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