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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서평] 공간으로 본 인간
[테마서평] 공간으로 본 인간
  • 박소연 객원기자
  • 승인 2002.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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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주체를 구성한다

『공간의 역사』(마거릿1 버트하임 지음, 박인찬 옮김, 생각의 나무 刊)『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이진경 지음, 소명출판 刊)

이진경 박사가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을 통해 던졌던 질문들의 핵심적인 문제 지점은 분명 “우리가 넘어야 할 근대성”과 “근대적 주체 생산의 방식”에 있었다. 따라서 사생활 내지는 프라이버시의 영역으로서의 주거공간이라는 통념적 등치에 대한 비판이나 꼬뮨적 주거공간의 가능성이라는 저자의 메시지가 무수히 복제되고 자기 생명력을 갖는 동안, 이 책에서의 탐구가 주거 ‘공간’이라는 소스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탈근대적인 기획이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현재의 관심과 조우할 가능성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번역된 ‘공간의 역사’(원제: The Pearly Gates of Cyberspace)의 서론에서 마거릿 버트하임이 전제하듯, “우리가 본질적으로 공간에 속해 있는 한, 우리의 공간개념은 우리 자신의 인간관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공간은 인간에 관련된 주제”라는 점을 받아들여보기로 하자. 그리고 사실상 이 책이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조금 색다른 공간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기로 하자. 그 경우, 서로 다른 관심과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는 두 책을 공간이라는 하나의 화두와 그것이 양산하는 코드로써 가로질러 독해하는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간이 주체를 구성한다

우선 이진경 박사의 논의부터 살펴보자. 중세로부터 시작해 19세기 중간계급과 노동자 주택에 이르기까지, 주거공간의 변화양상을 탐색해가면서 그가 얻어내고자 했던 한 가지는,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주거공간이 학교와 공장이라는 근대적 주체를 생산하는 또 다른 축들과 ‘본질적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단절돼 있거나 대립하는 벡터를 갖지 않는다는 관점을 내놓는다. 오히려 주거공간의 역사를 “인간의 내면에 있는 사생활의 욕망이나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망이 펼쳐지고 발전한 역사”라고 보는 관점을 가장 흔하고도 잘못된 통념이라고 지적한다.

즉 중세유럽의 주거공간은 작업장과 하나로 결합된 혼성성을 보여주며, 17∼18세기 귀족들의 주거공간(hotel)이 보여주는 공간배치는 그들의 궁정생활의 연장선에 있는 ‘과시성’과 ‘공공성’ 혹은 ‘형식성’과 ‘위계성’을 골자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생활의 공간으로서의 주거공간(그리고 이와 더불어 결혼·사랑과 가족·성욕의 등치)은 고작 19세기 중간계급의 생활과 결부된 비교적 짧은 역사적 연원을 갖는다는 것이 이 책의 통찰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불연속성에 대한 통찰은 사실상 “주거공간이 개인에 미치는 효과 내지는 근대적 삶의 형식을 공간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개개인을 근대적 주체로 생산하는 양상을 보겠다”는 기획의 사전 작업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외적 감시의 시선을 대체해 버린 내적 감시의 시선, 혹은 ‘사생활의 욕망’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가족주의적 배치는, 노동자들의 욕망을 가족으로 재영토화하려는 부르주아지의 전략적 구성물이며, 자본주의의 질서와 충돌 없이 진행되는 사회화의 일부이다. 즉 자본주의적 질서 속으로 노동자를 편입시키는 기제인 (동시에 본질적인 조건은 아닌) 그 무엇이다. 이진경 박사는 “주체가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특정 조건 속에서 구성되어지는 것”으로 사고한다. 또한 학교·공장과 마찬가지로 주거공간이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주체를 만든다고 본다. 따라서 “가족에 갇힌 현재의 우리의 주거공간과 다른 주거공간, 현재의 우리의 삶과 다른 종류의 삶” 또한 가능하다는 관점을 제시하며, 그 근거로서 노동자들의 삶을 고민하던 코뮨주의적 주거공간 전략을 확인시켜준다.

공간에 의해 개인이 근대적 주체로 형성되는 양상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이진경 박사의 작업의 연장선에서 비교해본다면, 버트하임의 ‘공@?역사’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해명을 위해,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공간을 무엇으로 사고하고, 어떤 공간을 ‘희구’해 왔나”의 문제를 추적하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버트하임의 ‘공간’이 물질공간이라는, 공간의 지극히 일상적이고도 사전적인 범위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서구 역사에서 유토피아적인 혹은 종교적인 열정으로 채색된 공간의 개념은 영적 안식처로서의 천국에서부터 조화롭고 균형잡힌 우주라는 천체공간, 상대론적 우주공간과 초공간, 그리고 현재의 사이버스페이스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달리해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공간개념들의 변천사들 속에는 우리의 육체가 속해있는 물질공간과 정신 혹은 영혼이 속해있는 비물질 공간간의 긴장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즉, 단테의 신곡을 통해 볼 수 있듯, 기독교 패러다임의 중세인들에게 이상적 공간으로 간주되던 천국은, 물질과 영혼이 합일되는 ‘영생의’ 안주처였다. 그러나 근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실재하는 세계-물질공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수록, 기하학적 의미에서건 우주론적 의미에서건 영혼공간은 사라져 갔다. 과학기술이 종교의 지위를 획득해갈수록 영혼의 공간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했던 것인가. 그러나 버트하임은 바로 그 과학기술이 내린 ‘은총’인 사이버스페이스를 가리키며, 중세인들이 꿈꾸던 천국을 상상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정신적 공황에 빠진 인간이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저자에 따르면,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세계관 속에는 근본적인 무엇인가가 빠져있다는 생각”이 “비물질적인 자아를 위한 집을 제공해준 사이버스페이스로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신학 체계를 취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매력을 갖고” 있으며, 인간들이 “과거의 천국의 개념을 과학기술적으로 인정된 포맷에 따라” 포장한 사이버스페이스는 비물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 없는 종교, 사이버스페이스

그러나 여기서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성병의 염려 없이 육체로부터 해방된 사랑과, 편견을 모니터 뒤로 감추는 민주성, 자아를 유동적으로 포용해주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등의 긍정적 성격을 선전하는 것으로 저자의 메시지가 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버트하임은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종교가 무시하고 있는 공동체의 존재와 사회 전체에 대한 책무”에 대한 경고를 놓치지 않으면서,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장 위대한 가치가 공동체적 측면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사이버스페이스가 진정한 의미에서 실재하는 천국일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에게 달린 셈이다.

결국 이진경 박사에서건, 버트하임에서건, 공간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는지의 문제와는 별도로, 공간이 인간과 공동체의 문제라고 설정할 경우, 약간의 각별한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공간으로 환원된다는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욕망의 접속방식에 따라 삶의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주체·자아와 영향을 주고받는 현실의 (주거)공간과 가상의 공간 모두가 고정된 실체로서보다는 코뮨적·공동체적 실천의 장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공통적 인식에 방점을 찍어본다면 어떨까. 유토피아는 선험적으로 존재해서가 아니라, 유토피아이게끔 만들어 가는 행위 덕에 유의미한 것 아니겠는가.

박소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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