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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형 리더십 발휘 기대 … ‘얼굴마담’ 그칠 수도
선비형 리더십 발휘 기대 … ‘얼굴마담’ 그칠 수도
  • 권형진 기자
  • 승인 2009.09.07 13: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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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다른 MB호 승선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보는 학계 시각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사진)은 ‘선비형 리더십’으로 대중에게 깊이 각인돼 왔다. ‘CEO형 총장’이 至高至善인양 받아들여질 때 학문적 권위와 자율성을 상징하는 최고 지성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국립대 총장이면서도 정부에 할 말은 확실히 했다. MB정부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올곧은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MB정부 새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자 학계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분위기다.


철학 다른 MB호 승선= 정 후보자는 지난 3일 청와대 발표 직후 서울대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나는) 경제철학에서 큰 차이가 없다. 기본적으로 경쟁을 중시하고 촉진하되 경쟁에 뒤처진 사람을 따듯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생각이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동안 정 후보자가 했던 발언이나 글을 보면 두 사람의 경제노선은 정반대 입장에 서 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조석곤 상지대 교수(경제학과)는 “정 후보자는 ‘케인지안’이고, 현 정부 경제기조는 철저한 ‘신자유주의’다. 경제철학이 다르다. 코드가 맞을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 후보자는 금산분리 완화, 감세 정책, 대운하 사업, 경기부양책 등 현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밝혀 왔다.


청와대 공식 발표가 있기 전 이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정 후보자는 “필요할 때 바른 말씀 올릴 테니 들어달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당연히 그래 주시길 기대한다”고 답했다. 정 후보자가 평소의 학자적 소신을 지킬 수 있다면 현 정부의 대기업-부유층에 편중된 경제정책 노선을 균형 있게 잡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 정부 들어 국무총리 역할이 대폭 축소됐다.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윤진식 청와대실장 등 ‘MB노믹스’를 지탱하는 경제팀도 건재하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됐던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을 대통령 경제특보로 복귀시켰다. 조 교수는 “경제팀이 그대로인 데다가 공정거래위원장, 금융감독원장 등도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코드가 달라도 경제총리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바람직할 텐데,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지방 국립대 ㄱ교수는 “금산분리 완화, 4대강 토목사업 등 이미 굵직한 정책방향을 정해놓고 강행하려는 구도에서 (정 후보자가) 정책기조를 바꿀 수 있는 여지는 크지 않다. 경제정책만 놓고 봐도 조금 유화적인 정책을 펼 수는 있지만 평소 소신에 맞게 바꿀 수 있는 정책도 많지 않다”면서 “같은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 한승수 총리가 그랬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MB정책을 도와주는 ‘얼굴마담’에 그칠까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시험대에 오른 ‘소신’= 그렇다고 정 후보자에게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학계의 우려 또한 다분히 ‘현실참여적인 지식인, 정운찬’에 대한 기대를 깔고 있다. 박광주 부산대 교수(행정학과)는 “경제학자로서 금산분리 완화를 반대한다고 했다가 대충 받아들이겠다고 하고 총리가 되겠다고 했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다 깨진다. MB정부 정책 잘잘못에 대해 소신 있게 비판해 왔듯 앞으로도 객관적 입지를 견지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한계가 보여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중도 성향의 대표적 논객인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과)는 “지금까지 비판받았던 정책을 중도실용과 서민경제, 국민통합으로 수정하겠다는 ‘큰 제스처’를 이번 인사에서 보여줬다는 점은 과소평가해서 안 된다”면서도 “다만 제스처로 끝나서는 안 되고 실질적인 정책구현으로 피부에 와 닿는 변화를 보여줘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판단은 조금 미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다. 평소 했던 말과 다른 방식으로 MB정책이 진행되고 총리가 아무 역할을 못한다면 한마디로 ‘실패한 지식인 출신 정치인’의 전철을 밟게 된다”며 “본인의 실행능력도 능력이지만 대통령이 (총리의) 운신 공간을 만들어 주고 정책도 맞춰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경희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은 “MB처럼 몸으로 뛰는 행동가형 리더십은 이론가형 참모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정 후보자는 JP나 이회창 전 총리 같은 실세형과 실무형의 중간형태라고 보면 된다”며 “절충형 참모의 성패는 대통령이 얼마나 권한을 위임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느냐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최 소장은 “정 후보자를 기용한 이유 중 하나가 ‘참신한 학자’ 이미지이기 때문에 학자적 순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행정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어려운 시험대에 올랐다. 기존의 선비형 리더십을 지키면서 탄력적인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대권이 열릴 것이고, 정치적 야심을 과도하게 드러낼 경우 파열음만 내며 정치적 회오리에 부딪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립대 법인화 등은 탄력 받을 듯= 한편, 정 후보자가 국무총리에 임명되면 MB정부의 대학 정책은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경제분야와 달리 교육정책에서는 정 후보자와 정부의 코드가 맞는 편이기 때문이다. 정 후보자는 서울대 총장 시절부터 대학 자율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대학 구조조정과 국립대 법인화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찬성 입장을 밝혔다. 3불 정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앞서 언급한 지방 국립대 ㄱ교수는 “대학 서열화라든지 서울대 중심주의, 입시 자율 등 교육정책에 있어서는 사실상 MB정부와 큰 차이가 없다”고 평가했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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