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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읽기] 질병의 역사 다룬 세권의 책
[비교읽기] 질병의 역사 다룬 세권의 책
  • 교수신문
  • 승인 2000.12.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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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2-06 16:52:31
질병사에 새겨진 인류문명의 발자취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질병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좋은 것이 2권 있었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의 {역병과 종족들(Plagues and Peoples)}(1976년)의 번역본과 타츠카와 쇼지(立川昭二)의 {질병의 사회사(病氣の社會史)}(1971)를 중심으로 편저한 책이 그것이다. 멕닐의 책은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허정 옮김, 한울, 1994)라는 이름으로, 타츠카와의 책은 {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황상익 편저, 한울림, 1998)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최근에 세 번째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가 여러 학자의 글을 편집한 {이야기가 있는 질병(Les Maladies ont une histoire)}(1985년)이 그것이다. 이 책의 번역명은 {고통 받은 몸의 역사}(장석훈 옮김, 지호, 2000)이다.

공교롭게도 이 세 책 모두 원제와 번역명이 일치하지 않는다. 문화가 달라서 원제를 그대로 썼을 때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 점이 한가지 이유일 테고, 원제보다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싶었던 게 다른 한가지 이유일 테고, 원제 그대로 뽑으면 너무 밋밋해서 독자의 흥미를 끌기 어렵다는 게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멕닐의 책은 첫 번 째 경우에 속한다. 멕닐은 세계사 전체를 서술 대상으로 하면서 문명권의 성장에 따라 어떤 역병들이 맹위를 떨치게 되었고, 또 그 역병이 어떻게 여러 문명권에 속한 종족의 운명을 바꿨는가를 보이려고 했다. {역병과 종족들}이란 원제는 이런 내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제목이 다양한 역병과 다양한 문명권의 삶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비해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란 번역명은 무난하기는 하지만 그 역동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타츠카와 쇼지의 {질병의 사회사}는 글자 그대로 질병의 사회적 측면을 보이려는 책이다. 여기서 사회성은 전쟁, 종교, 민족, 인종, 산업 등을 뜻하는 것이다. 이 책의 편저자인 황상익은 내용을 가감하는 한편, 그 사회성을 문명으로 확대해서 읽었다. "인간이 없으면 인간의 병이 없고, 문명(인간집단)이 없으면 역병이 없다"는 당연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잘 깨닫고 있지 못한 메시지를 강하게 부각시켰다.

{고통받는 몸의 역사}는 정말로 눈에 확 뜨이는 책제목이다. 역자와 출판기획자가 얼마나 세심하게 책제목을 뽑으려고 했는지 그 느낌이 온다. "몸의 역사"라--요즘 학계와 출판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몸'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원제인 {이야기가 있는 질병}가 이 제목보다 더 맘에 든다. 고프가 거대담론을 피하려고 일부러 이런 '소박한' 제목을 뽑았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질병의 전체 역사는 이런 것이다" 또는 "고통 받는 몸의 역사란 이런 것이다"라는 전체적인 인상을 강요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것을 자질구레하게 늘어놓는다. 이 시시콜콜함과 자질구레함에서 질병, 의술, 인간의 삶의 본질을 문득 통찰하는 것은 즐거운 역설이다.

"세계사는 역병의 역사 그 자체이다." 세계 문명사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멕닐은 이런 가설로 세계사를 엮었다. 그에게 역병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소도구가 아니라 주역이다. 그는 인구 집단의 형성이 역병이 활개칠 수 있는 토양을 양성했으며 그 역병으로 해서 현재까지의 문명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는 이런 관점으로 농경사회의 등장, 고대문명의 형성, 문명 사이의 질병 교류, 페스트로 인한 중세 유럽의 대파괴, 중남미 아즈텍 문명의 궤멸, 현대의 단일한 질병 문명권의 형성을 설명했다. 이렇듯 그가 잡고 있는 주제는 모두 굵직굵직한 세계사의 대목들이다.

타츠카와/황상익의 {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에서도 문명을 논하고 있지만, 이 책에 나타난 문명은 멕닐의 그것과 큰 차이가 있다. 멕닐은 역병으로 형성된 거대한 세계문명사를 엮어내었지만, 타츠카와는 문명 안에서 역병을 에피소드로 다뤘을 뿐이다. 주요 질병이 시대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질병의 기원, 그리스 시대의 전쟁과 질병, 로마 시대와 중세의 나병, 중세의 페스트, 르네상스의 매독, 산업혁명기의 결핵, 현대의 암 등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전형적인 질병사 서술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의 한 단면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책은 {고통받는 몸의 역사}이다. 이른바 '미시사적' 관점에 서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프랑스 지역에 국한된다. 그것도 조그만 특정 질병 또는 의술, 어떤 시기의 특정 계층에 국한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에 관한 세세한 내용들이다. 이를테면 페스트와 쥐의 관계, 나폴레옹 전쟁과 피푸스, 가래침에 대한 공포, 만병통치약인 해수욕 등과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아무런 규칙 없이 나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24개의 단편은 한 시대를 휩쓴 질병들, 앓는 사람들의 모습들, 시대적 의의가 있는 치료법들,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의학적 성취들 등 4개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제마다 최적자가 글을 썼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내용이 깊다.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를 읽으면, "세계사가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경탄을 자아내는 반면에 그의 가설이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견강부회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문명과 질병으로 보는 인간의 역사}를 읽으면, 각 시대의 주요 질병이 그 시대에 준 충격을 알 수 있게 해주나 다소 교과서적이다. {고통받는 몸의 역사}를 읽으면 생생한 현장감에 공감할 수 있으나 질병의 역사에 대한 전체적인 상을 획득할 수는 없다. 공교롭게도 3책이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신동원/전북대 강사·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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