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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창조의 욕망 앞에 던지는 새로운 질문
자기 창조의 욕망 앞에 던지는 새로운 질문
  • 김연순 성균관대·독문학
  • 승인 2009.06.22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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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인간에서 사이버휴먼으로』(성균관대출판부, 2009)를 말하다

인간에게 창조는 전능한 신의 고유권한으로 생각돼왔다. 지고한 초월자의 계획된 행위에 의해 우주가 탄생되고 세계의 삼라만상과 함께 인간은 생명을 얻고 형상을 얻었다. 그 형상의 원형은 초월적 존재자로서 신이었다. 회의되면서도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던 이 이야기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날 더욱 힘을 잃어가는 듯하다! 형상의 원형이 과연 초월자일까. 인간형 로봇에서 볼 수 있듯이 창조행위는 인간 자신의 욕구에서 비롯된 표현이요, 형상모방 또한 인간모습의 반영은 아닐까. 

‘사유하지 않는’ 과학기술과 상상력


인간은 자기창조욕망에서 신을 상정하고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함으로써 그것을 통해 자연 속에서 자기 존재를 정당화 하고 절대자에 버금가는 높은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었다. 자기창조의 욕망이 매시대마다 그 시대의 물적 토대에 근거해서 실현되는 과정에서 문화의 발전이 거듭됐고, 그 저변에 ‘사유하지 않는’ 과학기술과 상상력이 인간의 역사에 늘 함께 했다.
때로는 모호하게 때로는 당혹스럽게 지워지고 덧씌워지면서 인간의 자기창조 욕망은 과학기술과 상상의 힘을 빌어 수많은 흔적들을 역사에 남겨왔다. 그래서 이르게 된 현대적 결정체는 휴머노이드이며 미래적 가능체는 사이보그와 사이버휴먼이 될 것이다. 대상세계에서 충족해왔던 자기창조욕망은 이제 인간 자신의 정신과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인간 자신의 변형은 결과적으로는 가까운 미래에 종으로서 인류의 종말과 새로운 인류의 등장을 예견케 한다. 달리 말하자면 근대 이래로 인간과 기계간에 끊임없이 제기됐던 공존의 문제가 이제는 일치화 내지 합치화의 문제로 급진전하면서 더 이상 유보할 수 없는 답이 재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 답을 내리기에 앞서 이런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됐으며 무엇에서 비롯됐는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달음쳐온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이어져왔는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중층적으로 구조화된 욕망은 현재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등의 이해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불과 몇 십 년 전에 시작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반복되고 누적되면서 형성된 중층적 역사의 팔림프세스트에 널려 있는 흔적들을 역추적해 읽어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해낼 때야 비로소 현재가 명확히 보이고 그에 따른 답으로의 접근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정량화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한 근대 이후로 인간의 육체는 해부학적 이해와 수학적 계산을 통해 설명되고 인식되었다. 중요한 것은, 인체에 대한 이러한 과학적 인식이 데카르트로 하여금 육체를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기계’로, 인간을 ‘영혼을 가진 기계’로 규정짓게 했고, 정신과 무관한 물질적 구조와 기계적 특성이 주목을 받으면서 결국 육체를 산업화 과정에서 생산성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으며 아울러 육체조차도 인간의 손으로 창조될 수 있으리라는 대담한 상상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자기창조욕망이 실현됨에 있어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상상력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이원론적 사고와 육체의 기계적 원리에 근거해서 무한한 욕망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계라는 대체물을 통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상상 영역에 그대로 반영됐다. 특히 유명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작된 과감한 출발은 한 세기가 지난 뒤 차페크의 『로섬의 만능로봇』에서 일단락된다.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는 육체의 물질적 구조를 완벽하게 객관화한 로봇을 창안해냄으로써 자기창조욕망을 상상의 세계에서 실현시켰다. 상상이 현실화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산업용 로봇이 등장하고 그것의 진화가 거듭되면서 속도에서나 생산성에 있어서 이미 추월당한 인간은 마침내 기계에 질적 변화를 촉발시킨 컴퓨터의 발명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기계는 여전히 인간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통제의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강화돼가는 기계와는 상대적으로 인간의 나약성이 더욱 부각되기 때문이다.

기계는 컴퓨터의 진화에 힘입어 창의적 활동에도 가담할 정도로 질적인 변화를 거듭하면서 양적인 경합대상에서 질적인 경합대상으로서 인간을 위축시키고 있다. 더욱이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가상공간이 열리면서 인간은 기계가 제공하는 또 하나의 소우주에서 자기창조의 욕망을 다양하게 실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제시된 것은 기계 스스로가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통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첨단과학 기술에 힘입어 인간이 지속적으로 자신을 확장·강화시켜나가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기계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와 인간의 하이브리드 전략


인간에게 있어서 확장과 강화는 기계와 인간의 하이브리드 전략을 전제로 한다. 사이보그가 그러하고 아바타가 그러하다. 이미 문명화 과정에서 과학기술은 이질적인 것들의 혼융과 합리화를 꾀하면서 지속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거두어 왔고, 오늘날에는 그 연장선에 인간 자신이 자리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업그레이드(upgrade)’라는 용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고 업그레이드란 용어가 물질세계의 성능향상에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제와는 다른 삶 또는 내일의 새로운 인간 모습에 대한 희망과 요구는 매 시대마다 인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업그레이드해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사회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려 애쓴다. 심지어 무한한 확장되는 지식을 자기화하기 위해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두뇌까지도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견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 앞에서 인간은 업그레이드를 위해 기계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기계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가 됐다. 신체에 기계를 부착시키던지 어깨나 손에 칩을 삽입하던지 심지어 뇌에 기계를 연결시키던지 21세기의 인간은 점차 대담하게 기계화를 자처할 것으로 보인다. 뇌와 컴퓨터의 직접적인 소통을 겨냥한 ‘브레인 게이트’란 프로젝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비로운 영역으로 남아있는 뇌마저도 인간의 자기창조욕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듯 인간의 자기창조 욕망은 기계를 매개로 인간의 존재 확장과 강화를 지속적으로 현실화시켜왔다. 그러나 그 결과물 앞에서 인간 자신은 고유한 존재로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게 된다. 이런 질문에 이어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무력감에 빠져들게 한다.

이제 인간은 자기창조의 욕망 앞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인간이 무엇일 수 있는가. 장차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금까지 전개돼 온 두터운 역사를 일별하는 것과 그것을 위한 전제로서 학문간 소통의 노력은 불가피해졌다. 이것에 대한 고찰이 전제될 때 인간의 자기창조 욕망이 탐하는 신인류의 명암을 논하기에 앞서 그것이 어떤 것일 수밖에 없는가를 먼저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연순 성균관대·독문학

필자는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하이브리드컬처(공저)』등의 저서와 「문화와 그 타자로서의 광기에 대한 문화학적 고찰」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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