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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사회를 살아가며
경쟁사회를 살아가며
  • 교수신문
  • 승인 2009.06.2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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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조카를 데리고 어린이 도서관에 갔다가 뜻밖의 일을 경험하였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네댓 살 정도의 한 아이가 영어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신통한 아이구나. 필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조카는 그것이 아니었다. 조카는 시선을 못 박은 채 온 몸을 긴장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에 조카는 책을 꺼내들고 그 아이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경쟁심에 불타는 네 살배기 조카는 질세라 소리높여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영어는커녕 한글도 깨치지 못한 이 어린 도전자가 읽는 것은 진짜 영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우루 노리욜 마리바’ 하는 뜻 모를 주문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이 기이한 장면은 몇 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두 아이는 서로 힐끔거리면서 책장을 넘겨가며 영어와 마술 주문의 불붙는 경합을 벌였다.

필자는 조카의 행동이 깜찍하기도 했지만 은근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카가 보여준 그 순간의 긴장감과 흥분을 다시 떠올려 본다. 과연 경쟁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가.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자 분발하는 숨은 노력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무료할 듯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경쟁이라는 말 앞에 ‘선의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비로소 안심한다. 경쟁은 그 말뜻 자체로는 겨룰 競, 다툴 爭의 살벌한 싸움에 불과하다. 그런 까닭에 ‘인생은 어차피 경쟁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서 우리는 다부진 도전 정신이 아니라 저마다의 쓸쓸함, 삭막함, 체념 같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조카의 유별난 승부욕에 대해 걱정 반, 안도 반의 두서없는 생각을 하다가 필자는 오래전에 읽은 광고와 시의 차이에 관한 글을 기억해내었다. 그 글에 의하면, 광고와 시는 짧은 시간 안에 강한 이미지를 통하여 감성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광고는 새로운 욕구를 창출함으로써 현재를 결여된 것, 빈곤한 것으로 지각하도록 만든다. 반면에 시는 평범한 일상의 새로운 의미를 일깨움으로써 현재를 풍요로운 것, 아름다운 것으로 누리도록 만든다. 광고와 시의 차이는 결국, ‘보는 눈’에 의해서 삶은 삭막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슴 뿌듯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리고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사는 삶’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카의 행동도 경쟁이 아닌, 전혀 다른 눈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경쟁의 각박함은 조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행동을 경쟁으로 해석한 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삭막한 경쟁의 눈은 삭막한 경쟁의 삶을 더욱 조장하지 않겠는가.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는 국가와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강조된다. 교육의 방법에 있어서도 수월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학교 간에, 교사 간에, 학생 간에 끊임없는 경쟁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큰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남보다 잘 하려는 노력을 꼭 경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경쟁이 광고의 논리라면, 그것을 대치할 시의 논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가령 論語 學而篇에 나오는 ‘親仁’의 개념은 광고보다 시의 논리에 훨씬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공자는 ‘널리 사람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친하게 여기라’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훌륭한 이를 알아보고 그와 가까이 지내고자 하는 데에 있다. 어진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나 역시 그 사람과 같은 어진 마음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경쟁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현상의 이면에는 누가 누구를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인과 덕을 갖춘 사람과 한 무리가 되고자 하는 노력, 인성의 실현을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뛰어가는 영광의 시합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의미에서는 협동이고 잔치이고 놀이인 이 시합을 굳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경쟁만을 위한 의미 없는 경쟁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보다 못한 자를 친구로 삼지 말라.’ 후대에 성리학자들은 이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내가 나보다 뛰어난 자를 친구로 삼으려 한다면, 나보다 뛰어난 자는 나를 친구로 삼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주희는 답한다. ‘나보다 못한 자라도 어찌 물리치겠는가. 다만, 나는 나보다 뛰어난 자에게 친구 되기를 청하고, 나보다 못한 자는 나에게 친구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이제 경쟁이 아닌 ‘親仁’의 눈으로 그 날 도서관에서의 조카의 뒷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합을 끝낸 두 아이는 호기심에 차서 서로를 탐색했다. 소심한 조카는 애써 그 아이의 시선을 외면하며 혼자 노는 척하였지만, 그것은 보기 딱할 만큼 그냥 시늉에 불과했다. 그 아이는 방금 조카가 시합에서 읽은 책을 펼쳐 보기도 하고, 조카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이리저리 주위를 뛰기도 하였다. 그 아이가 조카의 어깨 너머로 무슨 말인가 건네었을 때 조카의 표정에는 수줍음과 우쭐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 날의 오후는 두 아이가 친구가 되어 어울리기에는 아쉽도록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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