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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는 가치는 한길로 흐른다” … 몸 떠나지만 열정은 활활
“변치 않는 가치는 한길로 흐른다” … 몸 떠나지만 열정은 활활
  • 최성욱 기자
  • 승인 2009.06.15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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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의] 8월말 정년퇴임 앞둔 세 교수의 대학 이야기

오는 8월 말 정년퇴임을 하는 교수들 가운데 경력 15년 이상 교수에게 주어지는 국가 훈·포장 수상자는 380여명. 서울 사립대의 한 교수는 퇴임의 변으로 “요즘 같은 시기에 대학을 떠나게 돼 어쩌면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대학을 떠날 채비를 하는 20~30년 경력의 베테랑 교수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리고 그들이 ‘남겨둔’ 대학의 과제는 무엇일까. 서로 다른 분야에서 열정을 쏟아온 교수들에게 ‘떠나는’ 소회를 들어본다.

“문득 우리에게 다가온 서너 번의 순간이 우리를 일으키고 살아가게 합니다. 여러분도 감동과 깨달음을 통해 ‘나를 깨우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김현자 이화여대 교수(현대시)는 지난 4일 마지막 강의를 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럴까.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만나는, 그 순간이 빚어내는 작별의 여운에는 늘 아쉬움이 배어있다. 학생들도 마지막 강의의 여운을 아는지 활짝 펼쳐진 입꼬리의 끝끝마다 숙연함이 내걸렸다.

“태양이 뜨고 지는 것, 멈출 수 없나봐요.”
정년퇴임식장, 영상에 담긴 자신의 최근 모습을 마주한 윤석효 한성대 교수(한국고대사)는 ‘학생들 사이에 웬 늙은이가 저기 있구나’ 했단다. 가야사 발굴에 심취해 일치감치 대학에 뿌리내린 윤 교수는, 답사나 엠티에서 학생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해가며 역사와 삶을 논하던 신임교수 시절을 잊을 수가 없다. “학생들을 이끌고 김해, 고령, 함안 등지로 가야사를 찾아 종횡무진이었죠. 학생들이 지칠 만도 한데, 저녁엔 막걸리·토속주 섞어가며 토론이 끝도 없이 이어졌어요. 그땐 술깨나 마셨죠.”

신임교수 시절의 호기당당한 열정은 학생들과 어우러짐 속에서 줄달음치기 마련이다. 김 교수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서른 여덟, 늦깎이로 임용된 김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은 언제나 권태롭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敎不倦’을 가슴에 새겼다.

이미지, 메타포 등 시론의 기본지식을 강의하던 신임교수 시절, 수업 도중 난데없이 날아든 한 학생의 질문은 敎不倦을 30년 교수생활 내내 깊이 아로새기게 했다. “우리 문학을 왜 서구 이론으로 배워야 합니까!”, “내가 아직 신임이라 잘 알지 못…” 김 교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김 교수는 정년을 앞둔 지금도 아찔하다.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교수는 한 몸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은 결국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 속에 있었다. 전준자 부산대 교수(서양화)는 ‘가르친다’는 말조차 조심스럽다. “미술이라는 게 원래 가르치는 게 아니니까요. 학생 개개인의 (작품)세계를 깨면 안되죠. 그저 곁에서 유심히 관찰하다 개성을 찾아 북돋워주면 되요.” 전 교수는 가르친다는 말을 ‘작업 지도’로 대신한다.

전 교수의 말마따나 이제 겨우(?) 교수생활에 농익어 가는 교수들에게 ‘교수’란 어떤 존재일까.
다시 태어나도 교수를 택하겠다는 김 교수는 누구보다 절제된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학문탐구를 이끌어내는 것에서 교수의 존재가치를 재발견한다. “교수는 ‘죽은’ 책과 지내는 삶이 대부분이지만 인류의 지혜에 더 보탤 것과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을 동시에 수행해야하기 때문에 흔들림 없는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교수의 역량을 승진과 연결시켜 학술지 등급, 논문 수로 정량평가하고, 연구비도 등급에 따라 지급 하는 등 교수가 논문에 매여 있는 대학의 현실은 교수에게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교수는 ‘교육’에서 교수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강의를 맡은 기간만큼은 밤잠을 조금 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신간, 새 논문 등을 부지런히 보면서 강의준비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힘들어도 전력투구해야죠. 그게 교수의 사명이니까요.” 전 교수도 동의한다. “교수는 자신이 작가, 연구자이면서도 교육자이니 둘 다 해내야 합니다. 예술가(연구자)로서 길은 잘 알잖아요. 자신이 걸어온 과정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해서 학생들이 새로운 안목에 귀 기울일 수 있게 지도하면 됩니다.” 연구에 매몰되는 대학가의 현실에서는 교수 스스로가 깨고 나와야한다는 충고일까.

촌각을 두고 펼쳐지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가치는 있기 마련이다. ‘변하지 않는 가치…’ 학문 분야의 차이를 반영하듯 전 교수는 예술적 표현을, 윤 교수는 됨됨이와 개성을 첫 손에 꼽았다. 김 교수는 “지속되는 가치와 변화되는 가치를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는 역할론을 주문했다.

논문과 프로젝트에서 비롯된 압력과 더불어 행정업무와 교수평가로 대변되는 ‘학생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요즘 교수들의 현실은 ‘역할갈등’의 연속이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연구에 매달리고 있는데 ‘대학 무용론’이 스멀스멀 불거진다. 역설적이다. 결국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실망 때문일 텐데, 정년을 앞둔 교수들의 입에서 아쉬움이 묻어난다.

“주입식 교육이냐, 발표와 토론이냐, 이런 교육 방법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죠. 내용을 바꿔야 하는데…” 윤 교수는 아쉬움을 묻어두지 않고 퇴임 이후 가야사 발굴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문화를 재해석하는 연구와 강연을 계속할 계획이다.

“시원섭섭하다면 ‘섭섭’에 조금 더 가깝지 않겠냐”고 소감을 밝힌 김 교수도 학회지, 문예비평지 등에서 쇄도하는 원고 청탁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했고, ‘50~60대를 위한 시 읽기’라는 새 지평을 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서정적 감수성을 정년까지 이어온 전 교수는 지난 12일부터 부산대 아트센터에서 정년퇴임 기념전을 열고 서정적 추상세계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정년퇴임은 교수직을 졸업할 뿐”이라는 전 교수의 소회는 ‘다시 시작이다’는 정년퇴임 교수들의 힘찬 첫 걸음을 느끼게 한다. 어디서 누구와 함께하든 그들 앞엔 학자의 길이 여전히 펼쳐져 있다.
김 교수는 박목월의 시 「강 건너 돌」의 한 구절로 마지막 강의를 갈음했다.

해 저문 시간에 돌아와

손을 씻으며

강 건너 돌을 생각한다

………

빛이 어디서 오랴

제 안을 밝히는 빛은

제 안에서 우러나야 한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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