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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다시 ‘횃불과 등대’ 자처한 교수사회
2009년 6월, 다시 ‘횃불과 등대’ 자처한 교수사회
  • 권형진 기자
  • 승인 2009.06.15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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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사회 시국선언, 어떻게 볼 것인가

교수사회는 전문성에 갇힌 ‘기능적 지식인’에서 벗어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정책 난맥상과 민주주의 후퇴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연일 터져 나오면서 지식인으로서 교수가 갖는 사회적 역할에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3일 서울대·중앙대 교수들이 물꼬를 튼 이후 12일 현재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린 교수는 93개 대학 4000여명에 달한다. 지난 1991년 5월 ‘공안통치 시국선언’에 60개 대학 2600여명이 참여한 이래 가장 많은 교수가 참여했다.

교수사회의 릴레이 시국선언은 우리 사회에 논란의 불씨도 지폈다. 故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에 대한 이 대통령의 사과와 민주주의 후퇴를 언급한 점이 주로 논란의 대상이 됐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말하기에 앞서 고려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의 가치 가운데 어떤 것이 후퇴했다는 구체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한다. 또 교수들이 집단행동을 할 만큼 ‘후퇴의 위기’가 심각한가도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뉴라이트 계열의 교수들도 바로 이 지점을 겨냥했다. 이들은 지난 9일 기자회견을 열어 “4·19민주혁명이나 6·10민주항쟁 때와 지금은 다르다. 현 시점에서 일부 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태도인가 하는 점에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교수들의 ‘反정부’ 시국선언을 비판했다. “침묵하는 다수를 무시하고 시끄러운 소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교수들’ 이름으로 낸 성명서에 참여한 교수는 128명이었다.

그러나 몇 명이 참여했냐는 ‘숫자놀음’으로는 교수들의 시국선언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2009년 6월은 우리에게 지식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묻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교수사회가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회복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사회가 긴장국면에 놓이거나 위기를 맞고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수들이 발언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한 전통이고, 또 당연한 일”(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이라고는 하나 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에 점령당하면서 교수사회는 전문영역에 갇힌 ‘기능적 지식인’의 역할을 강요받았고, 때론 스스로 그 역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도 한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기능적 지식인’에 눌렸던 ‘비판적 지식인’의 역할이 다시 힘을 얻는 징후로 읽어도 괜찮은 것일까. 건국대 시국선언에서 선언문을 읽었던 송기형 교수(영화예술학과)는 “예전에는 (시국선언에) 주로 인문·사회대 교수들이 참여하고 경영대, 공대 교수들은 잘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라며 “적극적 발언이 교수 사회의 대세를 이루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광주 부산대 교수(행정학과)는 “최근의 시급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지식인 속에 내재하고 있는 비판적 기능을 자각하게 하면서 시국선언으로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진행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반성하는 계기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시국선언에 참여하지 않은 한 서강대 교수는 “시국선언을 하려면 모여서 토론도 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메일 하나 돌리는 구태의연한 방식이어서 참여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 시국선언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개별적 자각의 계기가 됐지만 교수사회가 우리 사회의 고민과 대안을 담은 지적 담론의 생산자로 다시 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는 지적인 셈이다.

박광주 교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각자 껍질 속에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나오다 보니 공론의 장이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면서도 “전문성에 갇혀 지식인의 삶에 대한 성찰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은 계속 돼 왔기 때문에 이번 현실 발언을 통해 다시 한 번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 사회 지성사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에도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서울대 교수가 전부 1700명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의미를 축소했다. 국정쇄신 요구에는 “내가 왜…”라는 반응이다. 빅토르 위고는 “지식인이란 사람들 속에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험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며 방향 잃은 항해자의 항로를 밝혀주는 어두운 밤의 등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교수사회가 잃어버렸던 지식인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국선언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소리로 들린다.

권형진 기자 jinny@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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