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0:35 (금)
침묵의 ‘보물창고’가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침묵의 ‘보물창고’가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 배원정/한양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승인 2009.06.08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박물관, 문화의 메카로 떠오르나

대학박물관이 기존의 ‘대학 부속기관’이란 선입견에서 벗어나 ‘지역문화의 메카’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자료를 정리하거나 소장품 중심의 획일적인 전시를 보여주던 ‘창고’ 형태의 박물관에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 등 하나의 주제나 테마를 특화해 대중과 함께 소통하고 호흡하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대학박물관이 국내에 처음 설립된 것은 1930년대부터다. 1934년 고려대박물관이 대학박물관으로서 처음 문을 열었고 다음해 이화여대박물관이 개관했다.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박물관은 해방 이후 설립됐다. 1961년에는 18개교의 대학박물관이 모여 ‘한국대학박물관협회’를 결성해 대학박물관의 발전을 유도해 나갔다.

1967년 교육기준령에 의해 종합대학교는 200㎡이상의 박물관 설치를 의무화하면서 대학박물관들은 양적 팽창의 기반을 마련했다. 1970년대 이후 대학박물관은 국토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문화유적조사센터’로서의 역할을 강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대학박물관을 국토개발로 파괴돼 가는 문화유산을 지키고 학술적 자료를 수집해 학계에 제공하는 연구 집단으로서의 위상으로 정립시켜주기도 했지만, 대학박물관의 폭넓은 활동을 축소시키고 발굴조사라는 한 분야에 치중하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국공립박물관 할 수 없는 일 도맡아

또한 초창기 대부분의 대학박물관들은 도서관이나 건물 한 층을 사용해 전시실을 조성한 까닭에 전시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전시 역시 시대순으로 한 나열식 전시가 중심이 돼 유물의 예술성을 부각시키는데 취약성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이것은 대학박물관이 전문연구기관으로 자료의 역사적 가치만을 높이 사 그대로 잘 보관하려는 생각만이 강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일반 학생과 관람객들의 접근성을 어렵게 하면서 박물관 전시실은 전공연구자들만을 위한 자료실처럼 인식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대학박물관은 과소평가된 박물관의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박물관 독립건물을 세우고 새로운 전시환경을 조성해나갔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학박물관들은 대학박물관 특성화 작업에 주력하며 새로운 도약을 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특성화 작업은 대학공동체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대학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에 이바지하고, 전문박물관으로서의 역량을 강화시켜 지역사회의 문화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각 지역의 대학박물관들이 갖고 있는 전문성과 특화된 소장품들은 이들 박물관이 특성화된 박물관으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기반이 됐다. 

예를 들면 경상도 지역의 경북대와 부산대, 동의대, 계명대, 영남대 등 많은 대학박물관들은 신라와 가야문화의 실체를 보여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충청지역의 충남대, 공주대 등은 중원백제문화의 중추적인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발판 위에서 이화여대박물관이 도자전문박물관으로, 동국대박물관은 불교전문박물관으로, 숙명여대박물관과 단국대박물관은 복식전문박물관으로, 전북대박물관은 고문서전문박물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대학박물관들은 국공립박물관 등 여타 박물관들로서는진행하기 어려웠던 성과를 올리면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성화된 대학박물관들은 깊이 있는 연구 성과 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전시 기획으로도 대학박물관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한양대박물관의 경우 최근 몇 년간 공업사·기술사에 초점을 맞춘 전시들을 지속적으로 열며 기존 대학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기발한 기획들로 대중과의 눈높이 맞추기를 시도하고 있다.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 된 핸드폰을 전시 주제로 삼은 ‘이동통신문화전: 호모 모바일런스’展이나, 석기· 청동기에 철기까지만 다루던 기존 박물관의 고정관념을 깨고 플라스틱을 주제로 삼은 ‘제4문화: 플라스틱 101’展, 지난 70년간 한국 현대문화에 혁신을 일으킨 유물만을 모아 근현대 달라진 생활문화를 재조명한 ‘모던코리아 70’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꾀하는 전시기획 외에도 서울대박물관을 비롯한 영남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 등은  터키나 인도, 일본 등을 비롯한 외국과의 비교전시를 시도해 전시의 깊이와 폭을 더해가고 있다.

한편 대학박물관의 사회교육프로그램도 지역사회와 연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서울대, 이화여대, 충북대, 영남대, 고려대, 계명대 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박물관은 매년 정기적으로 대중적 관심이 높은 주제를 선정해 학생 및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문화강좌를 개최하거나, 문화유적답사를 실시해 학문적 욕구를 만족시키고 친교의 장에 참여케 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경희대자연사박물관의 경우, 유치부·초등저학년부를 대상으로 ‘어린이박물관교실’을 열어 관찰과 놀이를 통해 연체동물의 생태와 구조를 학습하게 하는 등 체험학습장으로서 높은 호응을 받고 있다. 이러한 박물관들은 대학박물관이 제시할  수 있는 일종의 ‘역할 모델’을 잘 발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국공립박물관이 없는 지역에서 대학박물관은 해당 지역 문화의 메카로 더욱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지역문화의 메카가 되기 위한 조건들

그러나 여전히 한계점들은 있다. 3명 중 2명꼴로 대학 4년 동안 “한 번도 모교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학생들의 고백과, 턱없이 모자란 박물관 예산부터 전문인력의 부족까지 개선사항들이 산재해 있다. 학교의 학생들조차 박물관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는 대학박물관 자체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으며, 또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다. 보다 거시적으로 대학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대학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상아탑으로만 존재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 자체도 변화를 꾀해야 하며, 실제로 담장을 낮춰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대학의 문화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박물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박물관 선진지역인 유럽이나 아메리카 지역의 경우 대학의 문화, 예술, 지적수준을 평가할 때 도서관, 박물관, 공연장, 연구소 등의 활동과 운영 실적, 효율성 등을 주요 평가대상이자 항목으로 삼는다.
반면 한국의 경우 대학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됐던 대학박물관 부문은 1984년에 평가 항목에서 삭제됐다. 자연스럽게 대학박물관에 대한 정부 지원이나 대학 자체의 지원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과거 대학박물관이 부족하나마 대학 학습의 메카이자 현장으로 인식됐던 상황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보물창고로 변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대학마다 경쟁적으로 도서관을 증축하는 현실과는 반대로 몇몇 대학박물관은 아예 퇴물 취급 받고 있는 곳도 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재 선도적 역할을 꾀하고 있는 대학박물관의 선전도 일회성 반짝 이벤트로 그칠 우려가 크다.

올해로 한국에 박물관이 생긴 지 100주년이 됐다. 전국에 있는 크고 작은 박물관의 수를 헤아리면 800여개가 넘고, 그 가운데 대학박물관의 수는 110여개에 이른다. 이제 대학박물관은 또 하나의 특화된 박물관으로서 교직원과 학생 및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역할을 再考하면서 지역문화시설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분투하고 있다. 안팎에서 대학박물관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뒷받침 된다면 이러한 움직임들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배원정 /한양대박물관 학예연구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