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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 : 졸업한 후에도 시험을 보고싶은 여학생들
[만파식적] : 졸업한 후에도 시험을 보고싶은 여학생들
  • 교수신문
  • 승인 2002.03.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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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18 15:18:34
정진경/충북대·심리학

몇 년 전,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학생들의 학부모들이 남녀학생의 내신성적을 따로 내어달라고 데모를 한 적이 있다. 여학생들의 평균성적이 남학생들보다 높아서, 남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아진다는 이유였다. 나는 이 뉴스가 무척이나 재미있고도 흐뭇했다. 남녀공학 고등학교의 성적에서 보이는 이 현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남학생들이 내신 때문에 공학을 기피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삼십여 년 전에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다닌 나로서는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때는 남학생들의 성적이 더 좋았다. 전교석차를 발표하면 상위에는 남학생들이 주르르 들어가 있었고, 우리는 으레 그러려니 했다. 억울하지만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느꼈다. 알고 보니 그 벽은 의외로 사뿐히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 똑똑한 여학생들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남학생들이 공부를 더 잘 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더 우수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제 여학생들이 더 공부를 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이 더 우수하다기보다는 그저 성적을 더 잘 따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여학생들이 더 “약아서, 바지런해서, 꼼꼼해서, 독해서” 성적을 잘 올리는 것으로 여길 뿐, 능력이 우수하다고 인정해주는 데는 인색하다. 나는 여자의 뇌가 더 우수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든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편견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고등학교 교사인 내 친구는 “여학생들이 우수해. 성실해서 그래”라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학생들이 성실하고, 굳이두뇌를 운운할 필요 없이 그 성실성이 그들의 우수한 능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 성실하고 우수한 여학생들은 대학이라는 장에서도 그 능력을 화려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사관학교가 여학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삼군 사관학교 모두에서 여학생 수석 합격자가 나왔다. 명문 의과대학들은 이미 절반 정도가 여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수십 년 전부터 여학생의 성적이 늘 남학생보다 높았다. 교수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있는 대학에서는 올해 졸업식에서 의학과의 여학생이 전체 수석으로 총장상을 받았다. 학장상은 여학생 10명과 남학생 2명이 받았다. 일반적으로 남학생들이 더 우수할 것으로 기대하는 공대, 의대, 수의대로부터 법대, 경영대에 이르기까지 여학생들이 가히 수석을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대학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졸업한 이후에도 정정당당한 경쟁에서는 여학생들이 해마다 더 능력을 증명해 가고 있다. 사법고시와 행정고시를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여성들의 비율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80년대의 어느 해 사법고시에 “올해는 여성이 두 명이나 합격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기자의 시각에 실소했던 기억이 새롭다. 오랜 세월의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시적으로라도 여성공무원 할당제를 실시해야한다는 여성계의 주장에 수많은 반대가 쏟아졌었는데,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할당제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순식간에 올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험이 있는 세상의 이야기이다.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시험이 없는 모든 곳에서 성실하고 우수한 이 여학생들은 참패한다. 회사에서 추천의뢰가 와도 거의 남학생을 원하니 여학생들은 기회조차도 없고, 필기시험에 붙어도 면접에서 떨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그들은 교원 임용고시, 공무원 시험, 사법시험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시험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꿈을 펼쳐보고 싶어하는 수많은 분야에는 시험이 없고 그들은 견고한 벽을 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고 있다.
언젠가는 그들이 그 벽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차별을 방관하거나 묵인하는 것도 차별이다. 교수들은 이 졸업과 입학의 계절에 이 성실하고 우수한 여학생들을 위해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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