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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파멸을 예고한 18세기 전통 보수의 목소리
혁명의 파멸을 예고한 18세기 전통 보수의 목소리
  • 교수신문
  • 승인 2009.05.2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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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에드먼드 버크 지음│이태숙 옮김│한길사│2009

“이 의회(프랑스 혁명 때의 국민의회)가 권력을 획득하고 확보하면서 따른 원리는, 그들의 권력 행사에서 지침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원리와는 정반대다. 이 차이점에 관한 고찰이, 그들 행위의 진정한 정신을 찾아낼 수 있게 할 것이다.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했던 모든 일들이나 계속하는 모든 일은, 가장 통상적인 기술에 속한다.

그들은 야심가 선조들이 그들에 앞서 했던 그대로 나아간다. 그들의 모든 책략, 기만 그리고 폭력의 자취를 추적해보면,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법률 사무원에 걸맞는 세밀한 정확성을 동원해 선례와 실례를 따른다.

그들이 폭정과 찬탈의 정식 방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적은 결코 없다. 공공선과 관련된 모든 규칙에서는 그들의 정신은 정반대였다. 그들은 전체를 시험해보지 않은 사변의 처분대로 맡겨버렸다. 그들은 공중의 가장 소중한 이익을 그러한 산만한 이론에 맡겨버렸는데,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서는 그들 중 누구도 조금도 이론에 맡긴 바가 없다.”(본문 중에서)


 보수주의란 ‘아끼다’, ‘지키다’, ‘보호하다’를 의미하는 라틴동사 ‘consevare’에서 유래한 사회·정치적인 용어이다. 다른 정치적 이데올로기들과는 달리 보수주의(conservatism)는 매우 불투명하고 애매한 용어이다. 참고로 ‘보수주의자(conservateur)’란 용어는 1819년에 프랑스 정치가 샤토브리앙에 의해 최초로 사용됐다. 이 보수주의를 보수주의란 정식라벨이 붙은 병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마치 공기를 용해시키려는 자의적인 시도와 매한가지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정치 독트린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습관, 감정의 모드, 삶의 방식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이론가 러셀 커크(Russell Kirk)는 보수주의를 아예 ‘부정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했다. 때문에 우리가 보수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풍차를 적으로 착각해 공격한 無개념의 돈키호테처럼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수세기동안에 ‘보수적’이라 간주된, 오랜 전통사상들의 집괴가 존재함을 잘 알고 있다.

18세기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정치가이며 철학자인 에드먼드 버크는 이런 보수주의란 지적 전통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래서 그는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 또는 ‘수호성인’으로 널리 추앙받고 있다.      

그가 저술한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년)은 프랑스 혁명을 아카데믹하게 비판한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혁명을 곧바로 저주하지는 않았다. 1789년 8월 9일의 서신에서 버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은 놀란 경이의 시선으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프랑스를 지켜보고 있다. 이를 찬미해야할지 비난해야할지 아직 잘 몰라서이다.” 1789년 10월 5, 6일에 파리의 기세등등한 아낙네들이 베르사유 궁으로 행진해 루이 16세의 파리귀환을 종용했을 때, 그는 혁명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래서 샤를 장 프랑수아 뒤퐁이 혁명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은 왕정을 전복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결코 자유를 회복할 수는 없을 것이오.” 버크는 이성에 입각한 프랑스 혁명이 결국은 스스로 파멸을 초래해 아주 비참하게 끝날 것이라고 음산한 예고를 했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의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은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복잡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이상학 대신에 현실적인 해결방안의 실용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음식과 의약에 대한 인간의 추상적 권리를 논하는 것이 대관절 무슨 소용인가? 문제는 그것을 확보하고 잘 운영하는 묘에 달려있다. 나는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교수보다는 농부나 의사에게 항상 자문을 구하라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전통과 편견을 옹호했다. 그것은 기존사회질서에 대한 찬미라기보다는 버크 자신의 견고한 철학이었다.

20세기에 버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성향의 고전적 자유주의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프랑스혁명의 급진성과 폭력성에 대한 버크의 조리 정연한 비판은 이른바 냉전시대에 - 혁명이란 과격한 수단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지상천국을 꿈꾸는 -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매우 시의 적절하게 사용됐다.『자본론』에서 칼 마르크스는 버크를 아첨꾼이며, 철두철미하게 천박한 부르주아로 혹평을 했다. 즉 버크는 영국의 과두정치에 꼭두각시처럼 기용돼 프랑스혁명에 대항한 낭만주의적 과거찬미자이며, 또 미국혁명에 대해서는 영국과두정치에 반기를 든 자유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마르크스가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던 것처럼, 보수주의의 대부로 불리던 버크 역시 단 한 번도 ‘보수주의’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기독교사가인 크리스토퍼 도슨의 말마따나 중산층에 속하면서도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했던 마르크스는 자기 계급의 이익을 철저하게 배신했기 때문에 가장 나쁜 부르주아가 됐다. 반면에 버크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제대로 사수한 셈이다.

그는 사유재산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이며 사회구조의 좋은 토대라 굳게 확신했다. 그래서 처칠은 그를 가리켜 자유의 최고사도이며 권위의 챔피언이라 묘사했다. 역사가 브랜돈(P. Brendon) 역시 대영제국이 자유에 입각해서 통치돼야 한다는 버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사실상 대영제국을 위한 도덕적 기초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1790년에 버크가 책을 출판한 지 무려 218년 만에『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 번역돼 한국독자들에게 선을 보이게 됐다. 사회전반에서 ‘보수-진보’ 논쟁이 한창 가열된 한국적 상황에서 보수주의의 원류를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 있는 중요한 성찰의 계기가 되리라 확신한다. 그런데 현대의 보수주의자들은 실용성을 주장한 버크와는 달리, 자유시장이나 가족에 대한 이상주의적 견해 등 추상적인 이상과 논리에 의해서 보수주의를 견지하는 경향이 높다.

버크와 같은 의미로 미국의 前대통령 부시나 프랑스의 현대통령 사르코지는 보수주의적인가. 버크에 따르면 이상은 현실 속에서, 아니 아무리 고귀한 이상일지라도 일단 현실과 접촉을 하게 되면 타락할 소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사회제도는 되도록 바꾸지 않은 편이 좋다. 왜냐하면 그 개혁의 결과가 오히려 인류에게 더 무서운 재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문제를 떠나서 아무래도 있는 자들은 사유제를 옹호하는 자본주의를 지지할 것이고,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공평한 분배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편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버크 자신이 말한 대로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보전의 수단이 없는 국가이다.” 자기보존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변화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속하는 문제이다.

개(犬)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여전히 개이지만, 인간은 자신의 변혁의지에 따라서 삶의 질을 바꿀 수가 있다. 버크의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고 경멸했던 이른바 프렌치 독트린은 사실상 그가 찬미했던 영국적인 이상보다는 훨씬 더 근대인의 기질에 잘 맞았다. 과거 수세기 동안의 역사는 영국식 ‘법 아래의 자유(liberty)’보다는 프랑스식 ‘정치적 자유(freedom)’를 더욱 선호했다. 콩트, 마르크스, 민주주의적 전제주의, 급진적 평등, 정치권력의 중앙집권화, 보편적 간섭 내지 개입주의 등 역사의 매순간마다 버크가 두려워한 무장된 독트린의 파생물들이 넘쳐흐르지 않았던가.         

김복래 안동대·프랑스사

필자는 파리 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속속들이 이해하는 서양생활사』등의 저서와 「프랑스인의 의사소통 방식」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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