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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론자들, 일제 총독부 주장 계승” 8명의 소장학자들과 학문적 검증 나서
“근대화론자들, 일제 총독부 주장 계승” 8명의 소장학자들과 학문적 검증 나서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5.07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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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한국사학계의 오랜 쟁점 중 하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수탈이냐, 근대화의 계기냐를 놓고 학계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데는 ‘실증적 데이터’ 문제가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反식민지 근대화론의 좌장격이라 할 수 있는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사진)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이 펴낸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신용하 외 지음, 나남, 2009)은 주목할만 하다. “당시의 역사실체의 진실을 밝히는 실증주의적 연구의 축적을 통해 왜곡된 식민지상을 바로잡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서문의 말처럼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점을 파헤치겠다는 취지다. 8명의 소장 학자들이 집결한 만큼 다각적인 각도에서 비판이 이뤄졌다는 점도 특기할만하다.

먼저 오랜 세월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점을 비판해온 신용하 교수가 「일제의 식민지 공업정책과 한국사회경제, 1930~1945 :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 개발론, 산업혁명론, 시혜론 비판」이라는 논문으로 논의의 물꼬를 텄다. 신 교수는 논문 서두에서 최근 식민지 근대화론의 특징이 “일부 전후세대들이 학자의 지위를 갖고 학설을 표방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학문과 언론의 자유의 혜택에 기대어 공공연히 구 일제 총독부 주장의 현대판을 홍보한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핵심 논점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일제의 1910~1918년의 조선 토지조사산업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토지사유제도를 성립시키고 토지제도를 근대화시킨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점,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조선의 공업화를 추진해 1930~45년간 한국 광산개발, 공업발전, 산업혁명, 산업화가 눈부시게 달성됐다”고 주장하는 점이 그것이다.

신 교수는 후자의 논리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제시하는 통계 수치가 허점투성이라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신 교수는 1942년도 ‘일본자본의 조선 내 공업 설비 자본 투자액’ 자료를 분석, 한국인 자본은 1.6%에 불과했음을 밝힌다. 또 1931~1944년까지 전국 발전량 조사표를 분석하면서는, 발전량의 증가의 상당부분은 군수공업용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는 당시 일제 군수공업이 배치된 북한에 발전 시설의 대부분이 있었다는 점과도 맥락을 같다는 것이 신 교수의 지적이다. 그 외에 철도, 광산 자원, 방적공업, 시멘트 등 거의 모든 공업 분야의 발전이 일제의 식민 통치와 군수 산업에 종속된 성질의 것이었다는 점을 보이고 있다.

근대화의 이름으로 경제적 수탈을 자행한 것이 분명하다면, 최소한 근대 교육을 도입 정착시킨 공로(?)는 인정할 수 있을까. 고숙화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일제 식민교육 정책과 시학제도의 식민지적 특성」에서 부정적인 답을 내놓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제의 식민교육 정책은 일제의 식민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또 조선인이 저항을 극소화하는 고도의 이데올로기적 통치수단·침략도구였다.” 이런 이유로 “식민지 통치에서 일제 식민교육은 경제적 수탈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고 연구관의 주장이다.

그는 우선 식민지 교육정책이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과 궤를 같이해 성립됐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히 1911년 8월 칙령 229호로 공포된 ‘조선교육령’의 제2조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와 제 3조 “시세와 민도에 적합하게 함을 기한다”라는 항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이 고 연구관의 지적이다. 여기서 ‘충량하고 시세와 민도에 알맞은 교육’이란, “조선 청소년에게 일본의 천황제 절대주의 사상과 일본어를 주입시키고 저급의 노동력을 기르는 동화와 차별”의 교육 정책 기조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 연구관은 식민교육 정책의 실상을 시학제도에 대한 분석으로 구체화한다. 시학제도는 “학무구의 시학관이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과 총독부와 학무국의 식민교육 정책을 일선학교에 전달·전파하고, 일선학교가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있는가를 점검·감독”하는 제도다. 고 연구관은 조선총독부 훈령 제61호로 공포된 시학규정을 분석하면서, 일제의 교육 정책이 얼마나 엄격하고 촘촘하게 식민지배에 봉사하도록 설계됐는지를 보이고 있다. 고 연구관은 시학제도가 식민지 통치정책의 변화에 따라 변모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교육과 교수에 대한 장학의 기능보다는, 식민권력의 의지를 일선학교가 효과적으로 실행하고 있는가를 감독·시찰하는 기능에 더 충실했다”고 강조한다.
신 교수 등이 주축이 돼 펴낸 이번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학술총서 ①’로 간행됐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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