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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
자칭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
  • 교수신문
  • 승인 2009.04.20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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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적 관점』슬라보예 지젝 지음┃김서영 옮김┃마티│2009│839쪽

『시차적 관점』슬라보예 지젝 지음┃김서영 옮김┃마티│2009│839쪽

애드리안 존스턴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출간한 그 해 미국의 캘빈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에서 지젝은 자신의 꿈은 “헤겔의 루터가 되는 것”이라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발언은 진심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이다. 여기서 루터는 “왜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예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에 바로 믿음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시차적 관점』은 헤겔에 대한 지젝의 입장을 빼놓고 접근할 수가 없는 책이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헤겔적 혁신을 시도한다. 그 대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어떻게 되살려내겠다는 것일까. 바로 여기서 지젝이 내뱉었다는 저 고백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자만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믿을 수 있다. 지젝의 입장에서 보기에,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운동의 패배뿐만 아니라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헤겔의 루터’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학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고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티크』에서 빌려 온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진이 다분히 칸트에 의거해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과 반대로 지젝은 헤겔에 근거해서 이 개념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물론 지젝의 헤겔은 그 옛날의 헤겔이라기보다 라캉의 혁신을 거친 헤겔이다. 이쯤 읽으면, 지젝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원’하려는 그 방식에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본뜻’을 망친 스탈린주의로부터 이 ‘위대한 이론’을 분리시키는 것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젝은 엉뚱한 말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스탈린주의의 결합 그 자체가 바로 요점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이지만, 지젝은 실천에 무기력한 부정변증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젝의 말을 요약하면, 그의 라캉-헤겔주의적 철학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뼈”라는 최상위와 최하위를 오가는 헤겔적 무한판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적 무한판단은 둘이 아니라 하나(또는 전체) 자체에 내재한 수많은 간극을 모두 살피는 사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적 기능 상실은 양극단의 투쟁이라는 ‘기본 법칙’이 “대극의 양극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극성’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지점으로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이율배반’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임슨 역시 『시간의 씨앗』에서 지젝과 비슷하게 이율배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성으로 인한 변증법의 무력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지젝은 제임슨과 달리, 이런 이율배반이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하는 기반”도 존재하지 않아서 결코 고차원적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할 수 없는 대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변증법의 장애라기보다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간극은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대립구조라기보다, 하나의 내부에 상존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젝은 이런 양극성, 또는 이율배반적 대립을 “하나 자체에 내재적인 긴장, 간극, 불일치로 대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런 이율배반은 서로 다른 두 극단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시차’에 불과한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런 시차는 다양한 현대이론들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자 입자라는 것, 신경생물학에서 신경의 반응을 뇌의 회백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존재론에서 존재론적 지평을 그 기원으로 환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지평으로부터 존재적 영역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 라캉의 실재계에서 나타나는 실증적이지 않고 실체적인 일관성을 결여한 다양한 관점의 결락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과 충동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시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이 스스로 밝히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시차의 개념은 데리다의 ‘차이’(diff´erance)를 상기시킨다. 시차는 하나와 그 자체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미시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지젝은 시차와 데리다의 차이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연관성에 대한 적절한 이론화를 통해 데리다의 메시아적 정치학을 세속화한 레비나스적 ‘도래할 민주주의론자들’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 지젝은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 내재한 유물론적 속성으로 후기 철학의 정치학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지젝의 의도가 얼마나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지젝이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책을 자신의 주저로 손색없는 책이라고 밝히면서 그의 철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과연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역시나 그렇듯이, 이 책은 너무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분석하다가, 갑자기 정신분석학을 논하고, 여기에 신경과학, 문학, 영화, 정치에 관한 언설들이 마구 뒤섞인다. 지젝을 읽어온 독자라면 정신 사나운 지젝 특유의 스타일이 그렇게 낯설지 않겠지만, 여하튼 멋모르고 책을 집어든 독자에게 좌절감부터 덥석 안기기에 충분하다. 이런 다채로운 스타일을 두고 지젝은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를 통해 개념이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내부로부터 개념의 형식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지론이 곁들여진다. 이를 보면, 서문에 그가 왜 ‘개념들의 확장’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반헤겔주의자 들뢰즈와 정통 헤겔주의자 지젝은 말 그대로 ‘시차’인 것이다. 기발한 자화자찬에 절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이택광 경희대·영문학

필자는 셰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 등의 저서와 「라캉과 바로크」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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