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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기억이 없는 삶,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슬픔의 기억이 없는 삶,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4.13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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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억조작] 쟁점과 진단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것은 기억의 형식 속에 담기고 음미되며 반추된다. 기억을 지니지 않은 자에겐 겹겹이 쌓였다는 의미에서 삶이란 부재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와 사별한 기억, 이별을 통고 받은 기억, 억압과 폭력을 당한 기억 등등은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어한다. 저주에 가까운 기억을 잊지 못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렇다면 슬픔, 절망, 상처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제거할 수는 없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될 법하다. 그런데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보았을 ‘기억 조작’이 실현될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에릭 칸델 교수의 연구를 필두로 조셉 르두 뉴욕대 교수, 조첸 조지아대 교수, 강봉균 서울대 교수팀은 기억의 메커니즘과 조작 기술에 대한 연구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이미 쥐를 대상으로 특정 기억을 제거하는 기술은 상당히 진전됐으며, 인간을 대상으로 한 약물이 개발될 날도 멀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기억의 그 특성상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반복되고, 불쑥불쑥 출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마들렌을 먹다가 우연히 솟아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기억이, 다시는 반복되길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기억일 경우다. 우리는 잊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반복되는 고통스런 기억의 반복은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기억조작은 그 어감과 달리 웰빙과 행복에 기여할 신기술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기억조작은 성숙의 기회 박탈

그러나 한편에서는 기억조작 기술이 보편화되면 우리 삶의 존립방식과 문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행복한 순간만이 아니라, 슬프고, 고통스러우며, 힘들었던 시간을 경험하고, 그것을 반추하면서 성장하는 법인데, 기억조작은 이러한 성숙의 기회를 박탈할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달리 말하자면, 삶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과 같은 인간들로 세상이 가득 찰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기억은 개인의 삶에서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와 민족과 문명의 관점에서도 기억은 중요하다.

시대의 아픔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어두운 순간을 상기시켜주지만, 바로 그 아픔에 대한 공유만큼 사회 변혁의 원동력이 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기억조작 기술은 역사적 기억조차 조작하고, 왜곡하며, ‘지금의 행복’을 이유로 폐기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서 기억조작은 민감하고,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적인 기술이며, 인간배아 복제만큼, 혹은 그보다 더 성찰이 필요한 기술일지도 모른다.

이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고통과 좌절의 기억이 없다면, 과연 행복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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