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5:35 (월)
시공간의 편재화, 삶의 지축 변화시켜...'윤리기술'새로운 인식 마련해야
시공간의 편재화, 삶의 지축 변화시켜...'윤리기술'새로운 인식 마련해야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4.13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비쿼터스 시대의 양면성

산업사회의 출현은 지식 생산의 양상을 뒤바꾸었다. 대표적으로 사회학 등 실증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학문들이 생겨났으며, 자연과학의 방법론이 쇄신됐고, 인간 소외, 기술 등의 논제는 인문학, 사회과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지식 생산 양산의 변화는 정보화 혁명이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니다. 정보화 사회 혁명은 크게 인터넷, 휴대폰, 다양한 정보기기들과 산업화 시대의 재화를 대체하는 정보재의 출현 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인터넷의 영향은 지대했다. 출현해서 보편화되기까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이 인터넷의 시대 혹은 대표적인 인터넷 기술인 www의 시대라고 하기에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인터넷을 넘어선 다양한 네트워킹 기술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으며, 인터넷은 그러한 네트워킹의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넘어 정보화 사회의 더욱 발전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기술의 물결은 곧 유비쿼터스(Ubiquitous)를 의미한다.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의 라틴어인 유비쿼터스는 사용자가 컴퓨터나 네트워크를 의식하지 않고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기술 환경의 총체를 말한다.

 이는 작업이나 학습에 필요한 기존의 컴퓨터 외에, 가정, 도로, 휴가 심지어 오지에서조차도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일각에서는 유비쿼터스 기술의 보편화를 생활의 편리함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유비쿼터스가 단순히 편리함의 확장 그 이상의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는 크게 △ 삶 시공간의 확장 △ 집단 지성의 보편화 △ 지구와 인류에 대한 책임의 심화라는 3가지 테제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프랑스 철학자 미셸 세르는 인터넷, 휴대폰 등 대표적인 유비쿼터스 환경의 확대가 가지는 의미에 주목한 대표적인 학자다. 세르는 유비쿼터스 환경 속에서 우리는 “유비쿼터스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됐다면서, 기존의 국소화된 ‘주소’ 개념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소 과장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거의 모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무리는 아닌 주장이다. 유비쿼터스로 인한 삶 공간의 편재화는 시간의 편재화도 동반한다. 이미 세계의 정치와 경제는 24시간 체제로 연동돼 함께 움직인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단번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배경에는, 미국 경제가 지배적이라는 이유 외에도, 전 세계의 주식 시장과 금융 이동이 거의 실시간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있다. 이 나라와 저 나라, 이곳과 저곳, 그때와 나중을 구분하고, 그에 기반해 성립된 국소화된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비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 시공간의 유비쿼터스화가 불러온 첫 번째 변화이다. 세르는 이러한 변화가 민족과 인종과 지역 공동체 간의 구분이 야기한 “기존의 대립과 갈등을 종국적으로 폐지할 것”이라는 견해도 내놓는다. 다소 이상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는 있지만,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지적이다.

 다음으로 집단 지성은 미디어 철학자인 피에르 레비 캐나다 퀘백 대학 교수가 집중적으로 검토한 바 있는 테제다. 레비는 “유비쿼터스 환경이 가장 잘 구현되는 사이버 공간에서느 기존 지성의 국지화된 전략이 통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서 기존 지성이란 한 개체의 지력과 역량에만 의존하는 국소화된 퍼스펙티브에서만 작동하는 그러한 지성을 의미한다. 레비가 보기에 “사이버 공간에서,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지성은 집단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모든 개체는 네트워크와 연결을 통해서만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네트워크에는 그렇게 수많은 개체들이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 맺기를 하는 가운데서 집단적으로 산출한 지식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집단 지성의 가장 적절한 예로는 바로 한국에서 최근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촛불 시위이고, 다른 하나는 미네르바 사건이다. 촛불 시위의 경우, 대중은, 어떤 지도부나 중앙집권화된 조직 혹은 미리 조직된 이데올로기가 없이도, 자발적이고 집단적으로 상호 네트워킹을 모이고, 소통하며, 흩어지고, 스스로 반성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나의 거대한 생각하는 기계로서 집단 지성 그 자체였다. 미네르바의 경우는, 그가 고도의 경제 평론을 제출하기 위해 인터넷에 널린 정보를 활용한 점이 두드러진다. 흔히 보수적인 사람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의 이산성, 가벼움 그리고 저자권의 권리 침해 등을 이유로 비판한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바로 그런 정보들을 고도로 조직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다시 평가받으면서, 어떤 경제학자도 생산하지 못한 지식을 창출했다.

이를 두고 조동기 동국대 교수(사회학)는 “통신망으로 연결돼 세상과 소통”하면서 “집단 지성의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한다. 곧 미네르바는 차라리 집단 지성의 결과물이 표출되고 종합되는 수렴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마지막으로는 윤리적 책임 문제의 심화가 있다. 시공간상의 거리를 없애고,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동시에 가공되는 유비쿼터스 환경에서는 그만큼 파국을 야기할 위험성도 커진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서 파국은 여러 가지 의미인데, 전면전의 발발이나, 환경 대재앙, 혹은 개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이버 공격 등의 형태가 있다. 이는 집단의 형태, 실시간의 범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법적, 기술적 통제 장치로는 제어할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한국에서는 사이버 모욕죄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우선 한 쪽에는 윤리적, 법적 통제를 받지 않는 대중의 정서가 개인들의 인권을 숱하게 침해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유로 인터넷 공간을 통제한다는 발상은 오히려 독재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간단하지 못한 이 문제의 양가성은 유비쿼터스가 일반화된 사회, 집단지성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윤리의 문제 해결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더구나 일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사실상 지구 전체 공동체에 관련된 집단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유비쿼터스는 이와 같이 인간과 사회의 존재 양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결이 더 어려워지는 새로운 문제들의 출현도 예견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향후 학자들에게 산업 혁명 시대의 실증주의 이상의 도전과 충격을 감당할 전향적 자세를 요구한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