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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학 이면의 불평등성을 받아들이자
근대 문학 이면의 불평등성을 받아들이자
  • 조영일
  • 승인 2009.04.06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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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연구·비평 둘러싼 식민성 논쟁] <교수신문> 511호 하정일 교수의 반론을 읽고

<교수신문>은 지난 510, 511호에 한국 문학연구 비평의 식민성 문제를 두고 문학평론가 조영일 김포대 강사와 하정일 원광대 교수의 기고글을 게재했다. 조영일 강사는 하정일 교수가 대표하는 민족문학론에 대해 여전히 근대성에 갇혀있다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학문 식민성 운운하며 일본 비평가들 및 소설에 대한 몰두를 비판하는 하정일 교수는 얼마나 우리의 고유한 이론에 기반해 주장하냐는 반론이었다. 자생이론에 대한 강박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근대성의 한계에 갇힌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하 교수는 민족의 역사적 실존성과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한 지배 구조를 무시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문학적 유산은 네이션을 넘을 수 있다는 조 강사의 주장이야말로 상식론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이번 호에서 다시 조 강사는 외래 담론의 주체적 수용이나 이념으로서 민족 문학의 고수로는 문학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하 교수는 근대 문학의 시스템이 문제라면, 그 문제를 해결할 주체가 중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조 강사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 


 

[<교수신문> 511호 하정일 교수의 반론을 읽고] 근대 문학 이면의 불평등성을 받아들이자

 (인)문학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대화(논쟁)에 있지 않을까? 그러나 흥미롭게도 많은 인문학자들이 논쟁을 무용한 작업이자 시간낭비로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논쟁을 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대신에, ‘제도(대타자)의 인정’에 목을 매는 것인지도 모른다(착실히 실적을 쌓고 합숙까지 해가며 학진 프로젝트에 매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있어왔던 많은 논쟁들이 핵심쟁점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약간의 인신공격과 더불어 평행선을 달리는 것으로 끝난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번 대화 역시 ‘진도가 나가지 않는’ 논쟁으로 소비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가라타니 고진은 대화란 서로 다르기(비대칭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다름(소통장애)을 통해서만 대화(소통)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도’는 ‘소통불가능’을 즐겁게 감수하는 양쪽의 ‘소통에의 의지’에 달려있다 하겠다. 하정일 교수의 반론을 읽고, 필자는 이와 관련된 하정일 교수의 다른 글들(특히 ?한국근대문학의 위기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오늘의문예비평>, 2007년 여름호)을 정독하면서, 의외로 많은 소통지점을 발견하는(즉 오해를 불식시키는) 한편, 역으로 소통불가능한 지점(대화/논쟁이 시작되는 지점이자 소통의지가 발현되는 지점)을 좀 더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일단 하정일 교수의 입장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하정일 교수는 필자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한국문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본다. 그는 그 근거를 1990년대 한국문학과 그것의 연장인 2000년대의 문학이 ‘사적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포섭됐다(연대와 소통의 가능성과 사회적 상상력의 상실)는 점과, 그동안 한국문학을 이끌어온 민족문학 진영이 ‘체제에의 편입(즉 주류화)’를 지향함으로써 사실상 반체제적 급진성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렇다면, 하정일 교수는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을 어디서 찾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노도처럼 밀려오는 신자유주의이다.

 그는 최근 소설들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대부분 ‘새로운 민중’의 발견이라기보다는 ‘중산층적 감수성’의 재현에 머물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이 그리는 세계 역시 사적 이익들이 무제한적으로 충돌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는 이런 위기적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는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중산층적 환멸의식’(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반체제적 급진성을 회복하면, 한국문학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그는 황석영, 조정래, 김원일, 방현석, 김인숙의 최근작들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한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변경을 둘러싼 움직임을 ‘주류 편입을 위한 제도화의 완결판’으로 비판하면서 부디 그들이 그것을 거부하기(그는 이런 거부를 ‘참다운 문학적 선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를 기대한다. ‘시대에 저항하는 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 이것이 바로 그가 주장하는 문학이라 하겠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민족문학’이란 반체제적 급진성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의 문학운동을 가리키며, 흔히 이야기되는 ‘민족문학작가회의=민족문학론=창비진영’과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글이 발표된 후, 그의 기대와는 달리 민족문학작가회의는 ‘민족’을 떼어내고 주류화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사실상 민족문학운동을 해체시켰고, 그가 가장 큰 기대를 건 작가 황석영은 연이어 졸작을 양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 성공 덕택에 TV에 출현해 히히덕거리는 상황에서, 아마 그는 자신의 입지가 점점 축소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최소한의 기대가 사라지면, 그곳에서 자라는 것은 신념으로서의 당위인데, 그것은 종종 환멸의 대리보충으로서 채워지는 추억(기표에 불과한)에 대한 집착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가 자신의 중핵으로서 포기하지 않는 ‘민족문학’의 실체가 이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념으로서 그것을 고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그가 지향하는 ‘반체제적 급진성’에 굳이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문학’이라는 기표에 대해 집착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념(또는 이데올로기)을 만든 사람(이나 세대)은 자기 자신이 만든 이념을 쉽게 부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따르던 사람이 그와 같은 ‘부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이념의 고착화는 대부분 2세대에서 일어나며, 그런 경직화(이념화)는 대부분 1세대에 대한 어떤 ‘배신감’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나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명칭변경’을 한국문학사에 등장한 두 번째 ‘전향’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일본의 비평가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가 지적한 것처럼, 전향의 원인은 외적 강제에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대중으로부터의 괴리감’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창작과비평>의 문예창작란이 타문예지 출신의 인기작가로 채워질 때, 이미 전향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바리데기』와 『엄마를 부탁해』의 대성공은 그 진행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역으로 보면, ‘명칭변경’은 이미 바뀐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사후 절차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흐름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하정일 교수도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비전향’이 그들에게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할지는 모르지만, 역으로 보면 자기 입장(민족문학에 대한 염결주의)만을 고수함으로써 정작 ‘전향’이라는 흐름 자체를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 또한 대량전향 사태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이는 다른 말로 ‘좋았던 시절의 민족문학’을 계속 상기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오늘날의 문학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오늘날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반체제적인 급진성’이란 어떤 불변의 원리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역사적 입장들’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역사적 문맥이 달라지면 처음에는 진보적이었다고 할지라도 언제라도 반동적인 입장으로 바뀔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특정 입장의 장기지속은 사실상 전향으로 나아가는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급진성’의 최종형태가 그 자신의 소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새 술은 새 布袋에 담겨야한다. 더구나 그것이 ‘반체제적인 급진성’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결코 외래담론의 주체적 수용이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념으로서의 민족문학의 고수와 같은 추상적인 제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개개인에 대한 각성(계몽)과 그들의 무뎌진 양심에 호소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막연하고 흔해빠진 비판이나 개인들의 각성을 통한 민중과의 연대를 호소할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문제는 개개인에 있다기보다는 시스템(시스템은 결코 계몽의 대상이 될 수 없다)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문학시스템을 비판하면서 특히 ‘문학과 국가’(‘국가와 혁명’이 아니라)에 초점을 맞춘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나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피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에서 ‘식민성’ 논의는 자칫 잘못하면 국내에서만 통용되는 담론에 그칠 공산이 크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하정일 교수와 필자의 인식 차이에서도 나타난다고 본다. 하정일 교수는 이 테제를 말도 안 되는 수입담론으로 보고 그것에 휘둘리는 한국문학인을 조소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것을 밖에서 ‘수입된 담론’이 아니라 안에서 ‘발견된 담론’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둘러싼 문제의 핵심은 한갓 외국비평가의 말에 우리가 놀아나고 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년째 이 문제로 씨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와 관련해 국내 비평가끼리의 대화(논쟁)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찾았던 것이다. 나는 이런 ‘독백 현상’이 비평가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제대로 된 대화나 논쟁이 불가능하게 된 한국문학시스템에서 나왔다고 보고 문제 삼는 것이었고, 하정일 교수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중요한 것은 ‘풍문에 근거한 어처구니없는’ 일본제 담론에 휘둘리지 말고 우리 것(민족문학론)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문학적(학문적) 교류는 쌍방향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 자체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야기지만, 세계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와 같은 예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항상 한쪽이 높거나 낮았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 일본문학자들만 한국문학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문학자도 프랑스의 문학자도 심지어는 중국의 문학자들도 한국의 문학에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의 문학작품이나 이론을 번역해서 열심히 읽는데,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다그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불평이 영향관계에 존재하는 불평등함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정일 교수도 기대고 있는 세계체제론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문학은 겉으로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평등한 체제이다. 그렇다면 당연 이 불평등함은 개별 주체들의 노력이나 결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역으로 생각하면 만약 그런 불평등이 해소된다면, 그것은 진짜 ‘문학’(아니 인류)의 종언을 뜻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국가와 국가 간에 존재하는 ‘식민/피식민’의 관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근대문학 자체에 존재하는 불평등이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근대세계체제 하에서 유럽의 문학이 비유럽권으로 이식되면서 생긴 근대문학체제이다.

 그러므로 당연 우리가 읽고 쓰고 배우고 가르치는 근대문학 자체에 이미 불평등이 내장돼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함이 비단 국가 간의 문학(예를 들어, 일본문학과 한국문학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한 나라 문학에서도 불평등한(하정일 교수라면, 식민/피식민의)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가 종종 잊는 사실 중의 하나는 오늘날의 한국근대문학(‘민족문학’까지 포함해)이 기존의 전통적인 문학장르(고전소설, 가사, 한문학 등)를 식민화시킴으로써 성립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불평등한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시조부흥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무엇보다도 ‘민족문학’을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면, 그보다 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한문학이나 조선의 주자학을 ‘민족문학론’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한때 민족문학 진영에서 ‘3세계문학’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3세계문학’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도대체 왜일까. 우리 것을 소홀히 여기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식민성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가 ‘3세계문학’(주변부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심부문학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항상 문제 삼으면서도, 정작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주변에 있는(경제적 문화적 발전이 늦은)나라의 문학에는 지극히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따라서 하정일 교수가 주장하는 ‘영향의 쌍방향성’이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중심에 놓은 또 다른 일방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물론, 원론적으로 이를 긍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식민성을 벗어나기 위해서 서구소설/일본소설 읽기를 그만두고 ‘의무적으로라도’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소설을 읽어야 할까. 논리적으로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학연구자(비평가) 중 어느 누구가 태국어나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칠순을 바라보는 가라타니 고진이 자국의 문학을 부정하고 (불어도 독어도 아닌) 한국어 공부를 하는 것은 확실히 정신나간 짓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문학에 정말 필요한 것은 ‘민족적 특수성’에 대한 강조와 ‘주체적 수용’에 대한 재확인이라기보다는 바로 이런 ‘정신나간 짓’이 아닐까.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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