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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미묘한 인간 정서의 예속성을 설명할 수 없다면…
복잡미묘한 인간 정서의 예속성을 설명할 수 없다면…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30 1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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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인 서울여대 강사, ‘윅스퀼의 행태학’ 내세워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 옹호

스피노자 르네상스라는 말이 있다. 게루, 마트롱, 들뢰즈 등 프랑스 학자들의 선구적 연구에 힘입어 스피노자가 열띤 재해석의 대상이 된 현상을 지칭한다. 그 중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논란을 낳은 바 있다. 자신의 사상을 염두에 둔 탓인지, 조금은 무리하게 스피노자를 해석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스피노자 전문 연구자인 샤를 라몽 프랑스 보르도 3대학 교수(철학)는 자신의 연구서에서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두고 ‘얼빠진’ 해석이라며 비아냥거린 적도 있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번역한 바 있는 김재인(서울여대 강사·철학)이 최근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적극 옹호하는 논문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에서 윅스퀼의 위상」(<철학논구> 36집)을 발표했다. 특히 생소한 에스토니아 생물학자인 윅스퀼(Jakob von Uexk¨ ull, 1864~1944)의 행태학을 논의의 단초로 내세워 눈길을 끈다.

윅스퀼에 대해 그는 “동물행동학의 창시자 격(으로)…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에스토니아의 생물학자로…들뢰즈는 자신의 철학적 여정의 초반에 해당하는 시점부터 윅스퀼의 행태학을 통해 스피노자 해석을 이끌어간다”고 소개한다. 윅스퀼은 환경과 둘레세계를 구분했는데 “환경은 어떤 생명체에게나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인 반면, 둘레세계는 환경의 극히 일부분으로서 특정 생명체에게 유의미하게 존재하는 환경”으로 정의된다. 이런 이유로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물체들은 제각기 다른 둘레세계를 형성하며 살고 있으며, 단 하나의 동일한 환경에서도 종의 수만큼 다른 둘레세계가 존재할 수 있고, 심지어는 같은 종 내에서도 이런 차이는 후천적 경험 내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개체는 환경과 상호과정을 통해 성립


김재인은 이러한 윅스퀼의 이론이 생물학 연구에 일종의 칸트적 혁명을 도입했다고 말한다. 곧 “둘레세계는 환경이라는 사물 자체에 주체가 개입해 만든 자신만의 현상계”라는 점에서 칸트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재인에 의하면 윅스퀼은 칸트와 달리 주체와 환경이 상호과정을 통해 오랜 시간 속에서 진화한다고 봤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대목이 들뢰즈가 윅스퀼에 주목한 부분이라는 것이 논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개체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바로 자신으로 거듭난다는 윅스퀼의 이론에 들뢰즈는 왜 주목을 했는가. 여기서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해석하면서 제기한 문제를 살펴야 한다. 김재인은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해석하면서 제시한 “핵심 쟁점은 공통지의 형성이라는 문제였다”고 본다. 여기서 공통지란 스피노자의 개념으로 제2종의 앎을 의미하는데, ‘나’의 신체에 적합하고 윤리적으로 선한 만남이 어떤 만남인지를 아는 그러한 앎을 의미한다. 곧 공통지를 통해 우리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재인에 의하면 그간 들뢰즈는 어떻게 공통지를 획득할 것인가하는 점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통상 인간은 부적합한 관념과 의견 또는 상상에 사로잡혀 산다. 그런데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은 단지 ‘우리는 우리의 신체 구조에 적합한 만남이 무엇인지 올바른 앎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우연히 적합한 만남을 통해 기쁨으로 촉발될 수는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기쁨의 경험에서 올바른 인식의 길로 나갈 수 있고, 보다 능동적으로 윤리적 만남을 주도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할 뿐이다. 여기서 어떻게 우발적 만남에서 능동적 앎으로 넘어갈 수 있는지가 제대로 논구되지 않았는 것이 비판자들의 지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김재인은 “들뢰즈는 윅스퀼을 경유해서만 스피노자가 말하는 공통지의 발생과 형성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재인이 전하는 들뢰즈의 언급에 따르면 윅스퀼은 진드기 등에 대한 관찰을 통해 “짐승이 취할 수 있는 능동적 정감들과 수동적 정감들을 찾아내려 했”는데, 이를 통해 “공통지가 형성되는 과정은, 논리적 수학적 선험적 과정이 아닌 물리적, 화학적, 생리적, 경험적 과정”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이는 곧 앞서 언급한 개체와 환경의 상호과정을 의미한다. 어떤 선험적인 원리나 관념적 모색이 아니라 바로 이 경험적 상호과정을 통해 우리는 공통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김재인은 “우리는 우발적 만남 속에서 기쁨을 주는 만남들의 목록을 작성해서,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이 기쁨을 낳는 원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로 정리한다.

그러나 결론이 그럴싸하다는 점이 곧바로 그것의 학문적 올바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김재인은 물리적 경험과 과정을 강조하는데, 스피노자는 바로 그 물리적 과정의 힘 때문에 가상과 수동에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다는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또 김재인은 들뢰즈의 용법에 따라 기쁨의 경험을 강조하지만, 스피노자에 의하면 수동적 기쁨은 정서모방의 함정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을 더욱 복잡하게 증폭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로인해 기쁨을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면, 동시에 증오와 질투 등의 감정이 생겨나 오히려 고통에 빠지는 세상사의 이치와 같다. 일면적으로 기쁨을 주는 대상을 추구한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상호 간에 적합한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막의 복잡성을 무시한 결론의 단호함


물론 김재인은 “삶은, 진리와 자유는, 원리상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의 오랜 활동의 결과물, 오랜 싸움의 결과물일 뿐이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는 스피노자가 사고한 인간 정서의 양가적 운동과정과 복잡한 예속의 문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스피노자 자신이 제시한 정치적 전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김재인이나 들뢰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스피노자는 개인의 윤리적 해방이 “어렵고 드문 길”이며, 그것을 일반 대중에게 바라는 것은 “황금시대의 허구”와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은 바가 있다. 스피노자의 후기 저서인 『정치론』이 개인의 윤리적 전략이 아니라, 국가와 제도의 문제를 논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또 지나칠 수 없는 문제로 ‘발생적 인식론’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다. 김재인은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를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도구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이용해 더 나은 도구를 만들어서 어려운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지성의 작업도 그렇게 자신의 지적 도구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역량을 키워간다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흔히 언급하는 발생적 정의 혹은 발생적 방법과 혼동될 소지가 있다.  발생적 정의는 원인에서 결과를 인식하게 하는 정의로서 이를테면 ‘구란 반원의 회전을 통해 형성되는 것’과 같은 정의를 말한다. 반면 김재인의 설명은, 지식 생산 과정에 대해 외재적인 ‘방법’을 확립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와는 다른, 스피노자 특유의 내생적 인식론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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