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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지루하거나 단순하거나 … 同語反復 경제학서의 대안 찾기
[북리뷰] 지루하거나 단순하거나 … 同語反復 경제학서의 대안 찾기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30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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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리버럴리즘』『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네오리버럴리즘』알프레두 사드-필류 외 편저│김덕민 옮김│그린비│480쪽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강수돌·홀거 하이데 공저 지음│이후│446쪽

최근 출간된 책 중에 『네오리버럴리즘』이 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해 전 세계 좌파 경제학자들의 소논문을 모은 책이다. 각자가 자신의 전공과 취향에 따라 다양한 각도에서 신자유주의를 고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신화’, ‘일상적인 화폐적 실천의 안식처’ 등의 제목으로, 30명이 넘는 논자들이 각각 페이지 수로 10페이지가 조금 넘는 수준의 논문을 집필했다.

이렇게 수 십 명의 공저자들이 등장하는 책은 대부분 화려하고 요란한 외양을 갖게 된다. 수 십 명의 교수들이 한 목소리를 내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도 든다. 그런데 대부분 거기까지가 전부다. 이 책 역시 공저자를 대거 내세우는 대다수 책들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난삽하고 피상적인 논의들


일단 논의의 초점이 명료하지가 않다. 신자유주의라는 대주제를 바탕으로 국제관계, 주류경제학, 성정치, 제3의 길, 심지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신자유주의까지 논하는 통에 난삽하다는 인상을 준다. 논자들 각자에게 할애된 지면도 부족해서, 피상적인 논의가 주를 이룬다. 뭔가 잡다하게 읽은 느낌은 드는데, 딱히 남는 것은 없는 경우다. 예를 들어 아서 매키언 매사추세츠대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서 사회가 시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고, 민주주의가 위협당하고 있으므로 대규모의 정치실천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논문이라기 보단 어지간한 신문 기고문에서 접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를 늘여놓고 있는 격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각각의 논문 논지 전개 방식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한 명도 아니고, 수 십 명의 저자들이 거의 15페이지 간격으로 ‘신자유주의가 문제다, 대안이 필요하다, 연대가 필요하다’를 외치는 통에 끝부분에 가선 신물이 날 지경이 된다. 정작 그럴싸한 대안을 내놓고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과 사회를 견딜 수 없는 한계지점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까.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가 부정할까. 이 책은 적어도 이런 류의 책을 접할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수 백 번도 더 들어왔고 알고 있는 사항에, 좌파 학자들이 약간의 전문적인 설명과 분석을 제시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이론이나 개념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입문서, 분석서라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분석틀(약간의 포스트케인즈주의와 함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무덤에 몇 번이나 들어갔다는 점을 논자들은 무시하는 것일까. 설령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다시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식의 천편일률적인 분석의 반복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는 비용지불이 아깝지 않다. ‘자본의 내면화에서 벗어나기’라는 부제의 이 책은 한국과 독일의 두 진보 지식인이 자본의 내면화를 중심 주제로 쓴 글과 상호 대담을 편집한 책이다. 사실 책의 저자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상호 협조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점이 맘에 걸리긴 한다.

그러나 책의 본론격인 ‘자본의 내면화, 뒤틀린 주체성’장에 실린 논문들을 보면, 이러저러한 단점은 잊혀진다. 이 장에서 두 저자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문제다, 연대를 하자는 식의 조야한 주장을 하진 않는다. 두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연대와 저항이 필요한데 왜 “노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폭력적 시스템에 저항하기보다는 협력하게 된  것”일까.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왜 대중은 예속을 위해 피를 흘리고 싸우는가.
강 교수는 그 이유를 “트라우마의 결과인 두려움 속에 강자와의 동일시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자본이 강조하는 경쟁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욕망과 정서의 차원에 주목

저자는 말한다. “약자의 두려움이란 이런 것이다.

예컨대 참혹한 가난에 대한 두려움, 나라가 망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불황에 대한 두려움, 자식과 가족이 겪을 고초나 절망에 대한 두려움…그런 두려움의 조장이 자본과 권력에게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본의 ‘이렇게 하라’에 ‘싫어’를 외칠 수 있을까.

강 교수는 “내면의 욕구를 솔직하게 표출하고 건강하게 충족시키며 행복감 속에 자라게 돼 내면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설령 그것이 어렵다면 “성인이 된 뒤에라도 그러한 자신을 솔직히 인정한 상태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과 몇몇 단락은 나이브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두려움을 피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말하고, 나누고, 정면 돌파하면서 그때 비로소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영화 대사 같은 대목이 그렇다. 그러나 정치, 경제, 대중 운동을 정서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은 돋보인다. 에코 트라우마, 어스 트라우마를 논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공저자인 하이데의 다음 언급은 이 책이 기존의 논의와 사뭇 다른 지평에 있음을 시사한다.

“기이하게도 노조 활동가들이나 많은 진보 사상가들은 우리가 피해자 나무라기를 한다고 두려워하는 것 외에, 계급투쟁의 심리화라며 두려워하거나 노동자들을 병들었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냐고 두려워합니다. 요컨대 그들은 계급투쟁에서 힘이 약해질까봐 사뭇 두려워하지요.……그러나 이는 사람의 구체적인 느낌을 무시하고 추상적인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를 자기 느낌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야말로 상흔 이후 증후군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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