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10:30 (월)
[출판동향] ‘智衆’, 새로운 대중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나
[출판동향] ‘智衆’, 새로운 대중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나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3.23 14: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중은 흔히 노동자 농민 빈민을 표징하는데,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명확한 민주항쟁 시대에 주로 통용된 개념이다. 중민은 한상진 교수가 1990년에 제기한 개념으로 ‘중산층 가운데 민중의 정체성을 가진 세력’으로 규정되는데, 널리 알려진 개념은 아니다.

다중은 네그리의 용어를 국내에서 번역한 용어인데, 대중의 능동적인 정치적 역량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다중 개념은 기존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대중을 바라보는 계몽주의적이고, 근대적인 관점을 쇄신한다는 동기를 담고 있다. 일괴암적인 기존의 대중 개념과 달리 각자의 독특성이 총체성 속에서 환원되지 않는다. 한편 발리바르는 대중들이라는 개념도 제시한 바가 있다. 다중이 지닌 지나친 낙관주의를 배격하면서 대중이 지닌 내적인 복합성과 양가성을 고려하자는 취지다.

다양한 이론적 형국

이런 다양한 이론적 형국에 국내 철학자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하나의 목록이 더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 연구자로 유명한 구연상 우리사상연구소 연구실장이 최근 저서인 『철학은 슬기 맑힘이다』(채륜, 2009)에서 지중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지중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구 연구실장은 “지중은 중민과 달리 계급에 상관없이 활동하지만, 민족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민중을 닮았고, 저마다의 모래알 같은 고유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대중”이라고 규정한다. 또 지중은 “어떤 이데올로기적 변혁 이념을 추종하기보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진실을 따른다. 대중처럼 대중문화를 즐기지만 거기에 매혹당하지는 않는다. 지중은 저마다의 분야에서 전문적 식견과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자기만 옳다는 권위주의적 신념체계를 거부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 구 연구실장에 따르면 “지중은 공동체적으로 소통하려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이 제공한 진실이 공동체적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지중은 공동체의 문제를 수사학적으로 해결하려 한다.”

우선 각자의 고유성을 잃지 않는다는 지중의 특징은 현대의 유수한 정치철학자들이 반드시 언급해야 할 새로운 대중의 기본 덕목(혹은 새로운 개념의 필수적인 이론 요소)에 속한다. 또 계급에 상관없이 활동한다는 측면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차별점을 두고자 하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공유하는 바다. 스스로의 진실을 추구하고 귄위주의적 신념체계를 거부한다는 대목은 대중의 정치적 역량을 신뢰하는 낙관주의적 흐름과 비슷하다. 게다가 소통을 통해 수사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향은 하버마스를 연상시킨다. 이쯤 되면 구 연구실장의 지중 개념에 어떤 이론적 독특함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 개념이 이론적 근거를 갖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네그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탄탄한 독해를 바탕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중의 자율성을 논한다. 들뢰즈 역시 수 십 년 동안 천착한 생성과 욕망의 사유를 기반으로 도래하는 민중을 말한다. 발리바르의 경우에는 네그리와는 다른 맥락에서 읽은 스피노자에 대한 영감을 바탕으로 대중들의 개념을 제시한다. 근대 정치철학의 성과는 물론이고, 파시즘과 공산주의 운동의 경험도 배경으로 한다.

독창성과 이론적 근거는 전무


이에 비해 구 연구실장은 지중에 대한 장황하고 현란한 묘사를 하기 전, 그 근거로 단지 “2008년 한국 사회”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과연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들에 답할 수 있을까. 촛불시위를 통해 지중이라는 새로운 대중이 출현했는가, 아니면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인가. 지중의 출현이든, 그들에 대한 인식이든, 그러한 현상의 원인과 이론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촛불시위가 잠잠해진 지금, 그렇다면 우리의 지중은 어디에서 잠자고 있는가.

숱한 지성들이 등장하는 사상의 성좌들 사이에서 한 개념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이론적 토대가 확고해야 한다. 새로운 용어를 던져놓고, 좋은 말들만 병기한다고 ‘좋은 개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자의 손은 희망사항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인 것들을 향해야 하는 이유에서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