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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통섭개념 ?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새로운 통섭개념 ?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 임건태 고려대 강사·철학
  • 승인 2009.03.16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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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철학한다』이광래 지음┃지와사랑│2008│192쪽

이 책은 ‘방법’으로 사상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저자에게 방법은 사상의 내용이나 그 사상을 배태한 시대와 무관한 형식이 아니다.
사상을 담고, 가공해내며, 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인간 삶까지 주조해내는 ‘방법’은 욕망과 각각의 시대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단순히방법론에 철학사적 고찰보다는 역동적으로 지금과 미래를 담지할 사상의 ‘방법’ 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통섭, 융합현실, 집단지성 등 무거운 철학서에선 찾아보기 힘든 테마가 등장한다. 환원주의적 냄새를 풍기는 윌슨의 통섭(consilience)을 대신해 통섭(convergence)을 제안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이 저술의 제목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하는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특징이자 존재 방식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방법적 존재”이다. 인간은 결핍된 존재로서 항상 무엇인가를 욕망하며, 따라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 역시 강구한다. 결국 욕망하는 존재는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욕망에 맞는 방법을 통해 자신이 마주한 세계를 부정과 비판을 통해 항상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욕망의 通史’이자 또한 그러한 욕망 실현을 위해 등장한 수많은 방법과 ‘反방법’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또 이 같은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성과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文化이다. 그렇다면 사상이나 철학이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무엇인가.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이므로 사상이나 철학 역시 욕망과 본질적인 연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사상이나 철학은 욕망을 이성적으로 표현하고 로고스(논리)화 시킨 결과물이다. “욕망의 로고스화 그것이 곧 사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상사나 철학사 역시 넓은 맥락의 인간의 욕망사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욕망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스스로 과학기술을 통해 만들어 낸 가상공간에 주목한다. 지금까지의 인간이 욕망의 다리 놓기를 통해 지구상에서 자연을 지배하면서 자신의 문화를 마음껏 펼쳐 왔다면, 이제 그 욕망의 지향성은 전혀 다른 지평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인터넷 등의 기술혁신으로 상징되는 가상현실이다. 이 가상현실은 더 이상 단순히 컴퓨터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보다 훨씬 더 그 이동성이 뛰어나고 나아가 그 실제 세계와 결합됨으로써 무한한 욕망의 출현과 실현이 가능하게 된 ‘융합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욕망 실현을 위한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면, 그에 맞추어 그 방법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다차원적이고 다양한 욕망의 회로를 포괄적으로 포착함으로써 그것을 전망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구체적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혁명적 방법이 절박하게 필요하게 된 시점인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이 같은 시대정신과 요구에 아주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개념이자 현상이 바로 ‘統燮(consilience)’이다. 이 개념은 주로 사회 생물학자인 윌슨이 주장한 것으로, 복잡다단한 사회 현실을 생물학적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유일한 방법을 바로 생물학이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 같은 방법이야말로 확장된 현실의 인터페이스 능력 제고를 위한 가장 탁월한 대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통섭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한다. 그 핵심은 통섭의 방법이 단순히 인식론적 요구로서 지금 신인류가 직면하고 있고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새로운 역사적 유목 상황에 들어맞는 존재 방식일 수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같은 통섭은 ‘지배욕망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권력기제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성 역시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독특한 개념이 바로 ‘通燮(convergence)’이다. 그렇다면 통섭(consilience)과 통섭(convergence)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자가 하나로 묶어서 포괄적으로 전체적인 전망과 통제를 시도하는 인식론적 방법이라면, 후자는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소통시키는 ‘융합적 존재방식’이자 ‘디지털적 존재방식’이다. 저자가 보기에 바로 우리가 속해 있는 디지털 유목 시대의 생존 방식은 이 같은 통섭(convergence)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인류는 누구나 아날로그적 현실에서 플러스 울트라 공간, 즉 디지털 기술이 확장시킨 융합현실로의 이동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촛불 집회 등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집단지성이란 개념 역시 이 같은 여러 가지 다양한 차원의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존재방식이 표출된 하나의 독특한 현상으로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섭의 주체로서 집단지성은 자율적으로 조직된 협동적 두뇌집단을 의미한다.”

사소한 사항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은 방법에 대한 천착과 분석을 함에 있어서 철학적 해석학의 성과를 좀 더 부각시켜 보았으면 어떨까하는 아쉬움이다.
주지하다시피 독일의 현대 철학자 가다머에 의해 주창된 철학적 해석학은 실증주의적 입장에 반대해 인식의 주관의존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에 맞추어 해석학은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 자체가 미리 앞서 주어져 있거나 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 역시 소박한 견해라고 비판하고 있다.

저자의 입장과 가다머의 입장이 크게 보면 통할 수 있는 면이 분명 있지만, 가다머의 이 같은 입장과 관계설정을 분명히 한 뒤 글을 전개했으면 설득력이 더욱 배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음으로 저자가 부정적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통섭(consilience)이 적용되는 차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다시 말해 만약 윌슨 등이 말하는 통섭이 디지털 유목 시대의 존재방식과 욕망 실현 방법으로 제시되지 않았다면, 저자의 비판과 대안 제시는 그만큼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윌슨이 주장하는 통섭이 과연 무엇이고, 그 설명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좀 더 분명하고 상세하게 적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끝으로 책 말미에 간단히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저자는 ‘디지털 판타지’의 모습에 대해 너무 낙관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처럼 여겨진다. 특히 피에르 레비같은 학자를 인용하거나 그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는 부분에서는 더 그렇다. 물론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낙관만도 비관만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적 질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균형적 서술을 위해서는 저자가 말하는 ‘프랙탈 네트워크’ 사이버 세계에서 가능한 부정적 측면 역시 긍정적 측면 못지않게 부각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방법을 취하는 것이 작금에도 계속 유행하고 있는 경박한 미래학자들과 학자적 차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같은 태도야말로 바로 저자가 말하는 긍정적 의미의 통섭을 적극적으로 응용한 결과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임건태 고려대 강사·철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니체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변의 사용』등의 역서와 『아이러니스트로서의 니체』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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