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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법과 정의의 양립가능성에 물음을 던지다
용산참사, 법과 정의의 양립가능성에 물음을 던지다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2.23 1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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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키움의 현장_공화사상연구회의 데리다 『법의 힘』 강독

한 겨울, 주거 생존권 보장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던 철거민들이 국가의 폭력에 산화한 사건은 세간에 심대한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많은 이들은 분노를 느꼈고, 유족과 제반 단체들은 지금도 진상규명 등을 외치며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2일,‘공화사상연구회’는 데리다의 『법의 힘』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데리다의 논의를 통해 오늘의 한국을 읽어보자는 취지다. 김홍우 경희대 인류사회재건연구원 명예원장, 이동수 경희대 NGO대학원 원장, 신충식 성균관대 강사, 장명학 경희대 강사, 이병택 경희대 강사, 이현휘 경성대 강사, 채진원 경희대 강사, 차동욱 연세대 강사, 김문주 박사과정생 등이 참여했다.
 
‘지상중계-콜로키엄 현장’은 연구자들의 집답회, 강독회 등 다양한 독회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지면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대합니다.


신충식: 이 책에서 말하는 힘에 관한 이야기라든가, 해체에 관한 것이라든지, 이런 이야기들은, 후반부에는 사실상 전반부의 반복입니다. 법을 하는 사람들에겐 전반부의 이야기가 허접해 보이겠지만, 현상학 부분에 대해서 데리다를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반부 이야기들은 대단히 새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정의라는 부분이 미래성이라는 시간의 개념을 통해서 이야기하자면, 소풍 자체보다는 소풍을 기다리는 마음 자체가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 마음의 정의라는 부분이 현재에 있는 법조문이 아니라 미래성에 대한 측면에서 볼 때 그런 식의 맥락 속에서 탈구성적인, 해체적인 정의나 법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차동욱: 경찰에 대해서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경찰은 더 이상 강제로 법을 적용하고 보존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법을 제정하고 명령을 공포하고 법적 상황이 사회의 안전을 보증하기에 불확실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개입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은 거의 모든 시간에 걸쳐 개입한다. 경찰은 법의 힘이며, 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경찰은 수치스러운 것인데, 왜냐하면 경찰의 권위 안에서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권력의 분리가 제거되기(또는 지양되기)” 때문이다. 경찰 자체를 의미하는 이러한 제거/지양에 따라 경찰은 법이 자신에게 입법의 가능성을 허용할 만큼 비규정적일 때마다 법을 발명하고, 자신을 ‘법정립적인’ 것으로, 입법적인 것으로 만든다. 경찰은 법의 권리를 가로채고, 법을 침탈한다. “(번역본 97쪽)

벤야민 자체가 비판하면서 아마 당시 20년대 초 독일의 상황을 비판하면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지금도 상당수 경찰이 입법을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집회와 시위에 대한 법률도 보면 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 상황에서만 허용하는 것처럼 돼 있는데요. 법 조문 자체가 이러이러한 경우는 금지한다 이러이러한 경우는 금지한다는 식으로 법조문이 되어있고,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냐에 대해서는 경찰서장이 결정하게 돼 있어서… 질서유지하는 사람들을 두면 괜찮은데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가의 판단은 경찰서장이 하는 것이다. 촛불시위에서도 질서를 지켰다 하더라도 불법이 되어버리는… 여기서 말하는 20년대 치안 정도를 담당하는 경찰인지 모르겠으나 미국의 ‘police power’라는게 단순한 치안이란게 아니고, 우리 헌법으로 치자면 국민기본권 제한할 때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공공부문 담당이 다 폴리스 파워에 들어가거든요. 복지행정도 사실상 폴리스 파워 개념에서 이야기하고…

 

법이 갖는 양면성의 미묘함

김홍우: 데리다가 경찰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죠? 많이 언급되고 있다면 오늘 하고 있는 이야기의 핵심이라 이거지. 데리다의 경찰론을 이야기했어야지요.

이병택: 경찰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참 더럽다고 느끼잖아요. 데리다가 그런 점을 잘 짚어낸 듯 싶습니다. 상종하기 싫은 존재로... 권력의 여러 가지가 경찰에 섞여 있다. 경찰 이야기를 하면 여러 가지 요소가 느껴진다는 거죠. 애매모호한 개념이 아닌가요?

김문주: 목소리와 현상을 보면 오염가능성/오염이란 말이 기표랑 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나오던데… 경찰이란 말과 오염가능성이 연결되는게 아닐까요. 경찰이란 언어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공권력이 되는거고. 경찰이란게 합의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공권력이란 의미가 더 중요했을 것 같아요.

김홍우: 공권력이야기는 최종화된 것이고 경찰의 이야기를 해야하는 것. 출발점을 거기서부터 삼으면 절대 실패한다고… 경찰에 초점을 맞추면 초보자는 오히려 쉬워지지. 경찰이 있어도 경찰을 무시하고 공권력을 발표하려고 하는 것. 공권력은 최종적인 목적인거야. 최종적인 것을 최초의 출발점으로 발표하려고 하면 안 돼요.

신충식: 법과 정의를 다루면서 데리다는 계산할 수 있는 것은 법이지만 정의라는 것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다고 말해요. 실제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려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바로 그 정의 속에서 법이 나올 수 있다라는 것. 그런 식의 차원에서 볼 때 데리다의 이야기가 상당히 하나의 고정화되어 있는게 아니라 융통성이 있으면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예비하는 마음을 가지고, 용산문제 같은 경우도 앞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줄 것인가, 그 부분에서 중요성을 띤다는 것이고, 이것이 시발점이니까, 시민들 입장에서 본다면, 관철시켜야만 그 다음 정의로운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이동수: 전제되는 것은 정의를 이야기할 때 미래에 올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인데 정의에 포함된다는 것인데 판단하는 근거를 제공하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다시 목적론적으로 되잖습니까.

신충식: 그 목적론적이란 것이 ambiguous적인 것이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란 거예요.

이동수: ambiguous 적인 것을 살려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끌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용산사건에서도 그것이 앞으로 가져올 미래를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는 접어두고 지금의 상황을  따져보는 것. 따져보는 과정 속에서 어느 쪽의 이야기도 법이나 정의에 있어 성립되지 않는 것임을 밝혀주는 과정인데 그 과정 속에서 떠오르는 부분들이 정의란 것을 지향하는 것이지 그것을 미리 끌어다 놓고 이야기하면…

이동수: 법과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법이 갖는 정의성에 대해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죠. 법의 양면성이 두 가지 다 포함돼 나오는 차원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오염돼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하지 않은 것, 어떤 것은 실재화되어 있는 것, 우리가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요. 법들은 정의라는 것을 지향합니다. 정의를 지향하지 않는 법은 없어요. 정의라는 것이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요. 어떻게 법적으로 실재화될 수 있는가요. 포스트모더니스트 같은 경우에는 르포르 같은 경우는 정의란 모든 가능성을 다 포함되기 때문에 ‘emptiness’로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이데거랑 연관돼 있는데 하이데거 같으면 도래하지 않는 미래라고 이야기해요. 뭔가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고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것. 데리다 같은 경우는 그 부분을 ‘absent’라고 말하죠, 부재한다는 것이죠. 소풍 이야기 중 틀린 점은 우리가 이미 내일 소풍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부분이 포함돼 있지만 데리다의 경우에는 그 사실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내일 소풍을 광릉으로 갈 것인지, 일본으로 갈 것인지는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죠. 소풍준비를 하는 가운데서 내일 가야할 곳을 상상하는 것이죠. 하이데거는 그것을 다가올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죠. 하지만 데리다는 실제화돼 있지 않고, 항상 결여된 것이라는 전제가 있는 것, 그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소풍 준비를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소풍이라는 것을 정의라고 간주할 수 있고, 법의 차원에 있는 것이죠.

법의 진보는 정의에 대한 호소에서

차동욱: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비판이 곧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이해할 때, 용산사건이 터졌으면 앞으로 유사 사건이 터질 가능성이 많은거고, 법훈련을 받은 사람은 미래를 보면서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공권력은 어느 정도 들어갈 수 있으며 농성자는 어느 정도의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지 한계를 정해놓고자 할 때 농성자는 자기표현의 범위를 넓히고자 할 것이고 공권력은 개입범위를 넓히고자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부정적인 효과를 줄여가자. 그렇다면 데리다의 정의는 무엇이냐. 사람들이 용산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분노라던가, 사람을 어떻게 죽여버리냐 식의 분노, 앞으로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분노하는 그 모멘트가 데리다의 정의냐.

장명학: 데리다의 경우는 현행법상 한 쪽은 데모를 하고 한 쪽은 공권력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벌어진 우발사다 이건데…문제는 지금 현재의 상태를 촉발하게 된 법적 규정이 있다고 봐야하는데, 그 사태 이후로는 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새로운 인식에 따라서 법의 규정을 바꿔야 하고 새로운 것을 하게끔 해주는 것 그것이 정의(justice)입니다. 실체적(substantial)으로 고정돼 있는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있지만 또 다시 바뀌어야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런 것에 열려있는게 저스티스라는 거죠.

채진원: 용산사태를 보면서 제 상식은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을 보면 공권력이 정당성을 확보한 이후에 개입하는 것이거든요. 정당성이 있는가요. 교통체증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공권력을 바로 투입하는게. 사람이 죽고 났을 때 보는 관점이 다르다. 검찰은 화재사건의 원인, 불, 사람이 왜 죽었나, 경찰의 진입 때문에 죽었는가, 이런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거죠. 법이라는게 정부가 개입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김홍우: 검찰 쪽에서 온건론 강경론이 있었을 겁니다. 온건론은 말할 기회조차 안주고 무시된거 아닌가. 철거민 쪽도 마찬가진데, 강력저항을 하자는 결정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된 것인지(알 수 없죠). 한마디로 하자면 독백주의의 충돌과정이었다는 거죠. 독백주의가 지배한 과정 자체가 부정의한 것이예요. 이런 문제는 표면에 드러나지도 않고 있다는 거지. 실정법 쪽으로만 해석되고 있으니까 문제야. 여러 소리를 들으려는 것 자체가 정의의 시작이야.

이동수: 데리다가 원하는 것이 바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선생님 말씀은 데리다가 찾으려고 하는 정의에 대한 문제는 경찰이나 철거민의 입장 중 어느 한 쪽이 아니고, 각각의 주의 주장들이 독백주의에서 나온 부분이 있기 때문에….

신충식: 벤야민의 경우에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 규정자들이나 규정을 따르는 사람이나 결국 추종해야 할 것은 민심이란 거고… 우리나라가 안정되고 그런 식의 부분들.

김홍우: 민심이란 것은 다른 식으로 말하면 분노예요. 그런데 그 의미와 논지를 읽어야지 분노만 이야기하니까 감정만 분출된 걸로 보이는거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분노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읽어내야죠. 현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해야지. 후방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말하면…

이동수: 선생님께서 생각하셨던 것처럼 독백주의화돼 있다는… 그렇게 독백화돼있는 것을 해체하는게 ‘deconstruction’이란 거죠. 강경진압론이나 화염병을 던지게 된 과정, 마치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된 과정을 해체해야 한다는게 데리다의 생각인거고 그 다음 단계는 지금 논의처럼 경찰이 잘했냐 철거민이 잘했냐의 문제가 아니라...

김홍우: 내 생각에는 다성악적 요소가 있다면 그 각각의 소리가 들려야하는거야. ‘deconstruction’은 들리도록 하는 게 아니지.

이동수: 들리게 하기 위해서 지금 과정을 deconstruction하자는 거죠. deconstruction했다고 해서 경찰도 틀리고 철거민도 틀렸다,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건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란 존재한다는 거죠. 정의란 무엇인가를 찾는 과정 그것이 해체죠.

김홍우: 정의란게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위험한건데. 최종적으로는 그렇게 돼야 하지만 너무 빨리 그것을 이야기하는 순간 의도가 의심스러워져.

 

용산사태 그리고 새로운 법의 발명

이병택: 용산 사태라는 것이 하나의 제네럴한 하나의 케이스로 쌈박하게 풀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용산사태라는 건 상당히 싱귤러한 케이스일 수 있는 거지요. 일반화시켜 이야기한다는 게 힘들 수 있고, 판결문이란 것은 옛날 재판이 아니고, 판결 자체가 옛날과 다른 차이가 있는 판결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이것이 데리다가 보는 해석적인 것입니다.

김홍우: 용산사태의 핵심은 철거민이고, 철거민은 너무 자기 내적인것만 강조하는 것이고, 공권력이 사실상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병택: 데리다의 경우에는 커먼 요소를 기반에 깔면서 인벤팅을 하더라도 커먼이 기반이 되는 그런 지적을 하고 있다. 퍼블릭이 되는, 그런 지적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표상문제 중요해지는 것이고, 벤야민을 통해서 표상문제를 지적하면서 함께 일어난, 함께 된, 이 부분이 이게 아까 이야기한 수행적이란 건데, 인벤팅을 하기는 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부분이 전제된 상황에서 그 부분이 강조된 게 아닌가 합니다.

녹취록 정리 : 김문주 / 정리 : 오주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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