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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고전의 특수성에 대한 진단 돋보여...학술번역과 대중번역의 경계 논란 예고
한문고전의 특수성에 대한 진단 돋보여...학술번역과 대중번역의 경계 논란 예고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9.01.30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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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리뷰]_한문고전의 특수성 다룬 <民族文化> 32호

 

번역은 반역이다’는 레퍼토리가 식상할 정도로, 번역 문제는 학계의 고민거리 중 덩치가 큰 편에 속한다. 학자라면 누구나 반역자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전령의 神 헤르메스가 되고 싶어 한다. 허나 그 만만치 않은 덩치 때문일까. 제대로 진맥을 짚지 못해 뜻하지 않게 반역자가 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도한다.

 

 이런 와중에 한국고전번역원의 <民族文化>(32호)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한문 고전의 번역과 번역학’이라는 특집을 통해서다. ‘한문’과 ‘고전’. 그 이름만으로도 외경심이 느껴지는 분야에 ‘번역’을 얹은 형국이다. 반역자가 되지 않겠노라 논자들이 단단히 작심한 기색이 농후하다.

 

 세 명의 논자 중 진재교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한문 고전 번역의 특수성의 안과 밖’을 통해 한문 고전 번역의 문제를 정면으로 해부한다. 진 교수는 논문 서두에서 ‘한문 고전 번역’이 번역 일반의 생래적 난이도에 특유의 까다로움이 중첩된 분야임을 지적한다.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더라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한문 고전 번역이라는 산을 장악할 정도라면, 번역 일반의 문제를 대적할 체력은 충분함을 시사한다.

 

 진 교수는 한문 고전 번역의 특수성으로 “한문 원전의 난해성, 전근대 시기 어문 분리에 따른 표기체계의 이중성, 한문 고전 작자와 현대 번역자 사이의 사유방식과 독서범위와 독서량의 차이”등을 들고 있다. 이를 진 교수는 △典故 活用處의 확인과 이해 △당대 역사 사실과 문화의 이해 △다양한 한문 양식의 이해라는 세 가지 논점으로 풀이한다.


번역한 문장의 출처가 저자 以前의 다른 저자의 것이라면


 우선 진 교수는 “한문 고전 번역에서 가장 힘든 경우가 典故의 확인”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한문 고전이 이전 고전의 구절을 종횡무진 인용하고 변형하면서 창작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배경으로 한다. 곧 “典故가 나오는 해당 원전을 찾더라도 과연 작자가 어떤 의미에서 이를 활용하고 있는지 속단하기란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진 교수는 그 예로 추사의 雜識에 나오는 ‘靜悟靑綠三十年’이란 구절을 일부에서는 추사의 발언으로 오해해 번역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張庚의 『國朝畫徵錄』의 ‘王翬’편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어려움은 원전이 우의적 구도를 갖는 경우나, 원전의 판본이 다른 경우, 원전을 인용하며 후대에서 다시 비평을 하는 경우에 증폭이 된다. 게다가 “알려지지 않은 글을 근거로 재창작 하는 글을 번역하자면 이중 삼중의 어려움이 있다.”

 

 

진 교수의 언급은, 전고 번역이라는 은밀한 어려움을 들춰냈다는 점에서 빛이 난다. 아무 생각 없이 단어와 문장을 번역해온 역자들로서는 앞으로 ‘이 구절이 누군가의 문장에 대한 간접 인용이나 비평이 아닐까’라는 긴장을 해야 할 대목이다.

 

이는 기실 동양 고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다. 성경 구절, 그리스 신화, 희랍과 로마 현자들의 경구에 대한 지식이 없이 제대로 서양 고전을 번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영불독어 번역에도 라틴어와 희랍어 문헌에 대한 통달이라는 조건이 붙어야 할지 모른다.


문맥에 대한 지식과 양식에 감각도 출중해야


 물론 쉽지는 않지만 문헌들에 대한 지식만으로 고전 번역의 산을 넘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넘어야 할 산, 건너야 할 바다가 많다. 진 교수는 전고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한문 고전번역을 위해서는 자국사에 대한 지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정확한 번역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任邁의 『雜記古談』중에서 ‘宦妻’편은 성에 대한 억압을 벗어나는 한 내시의 아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진 교수는 소설의 갈등 국면에서 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한다. 수백 냥의 은으로 내시의 아내는 매관과 치부를 통해 행복에 이르기 때문이다. 곧 “은에 대한 주석과 그 가치를 적시해주어야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 한 편의 소설, 한 수의 시조 번역을 위해 당대의 경제 상황, 정치 현실, 문화적 맥락, 역사적 흐름에 대한 박식한 앎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문맥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야 번역 일반의 문제점으로 널리 알려진 것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진 교수는 곧이어 다른 카드를 내밀며 고전 번역의 심란한 깊이를 더한다. “한문학 양식에 대한 기초 지식과 함께 각 양식의 표현방식을 고려해 번역하는 것이 필요”한데 “소설이나 산문의 경우만 하더라도, 기존의 문장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양식에 대한 지식이야 있으면 나쁠 것이 없지만, 그것이 번역의 문제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접선한다는 것일까. 진 교수의 의도는 문체의 문제에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 산문과 소설체 문장의 산문 혹은 소설의 문장의 경우, 번역자는 각각의 문체적 특성을 십분 이해해야 한다. 곧 “문체의 맛을 살리는 방향에서 번역해야만 문장의 분위기와 작자의 의도를 충분히 살릴 수 있다.”

 

이는 “소설류나 희곡에 등장하는 백화투는 한문의 문리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번역과정에서 더욱 곤란을 겪”는 원인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소설, 산문, 희곡, 시 등 다양한 양식에 대한 이해가 병행돼야 한다. 여기서 양식에 대한 이해라 함은 해당 양식의 문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필력을 의미한다.

 

이쯤 되면 번역가는 문장과 문맥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체에 대한 감각까지 지녀야 된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저자가 글을 쓸 때와 거의 동일한 상태에서, 그 감성적 측면까지 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술번역과 대중번역, 혼란스런 관계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


 한문 고전의 특수성에 대한 진 교수의 세심한 진단은 번역 일반의 문제에 대해서도 촘촘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러나 논문 말미에 등장한 학술번역과 대중번역에 대한 일갈로 인해 그 빛이 다소 바랜다.

 

진 교수는 한문 고전 번역의 의의를 “계층을 뛰어넘어 다양한 계층의 대중에게 튼튼한 문화적 자산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문 고전 번역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그런데 다소 상투적인 훈계가 민망한 듯, 곧이어 “기실 학술 번역과 대중을 위한 번역은 전혀 별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느닷없는 포문을 연다. 연구자들을 위한 번역과 대중을 위한 번역이 따로 존재한다는 말일까. “대중 번역이라는 개념도 모호하지만, 단순히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번역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다”는 말만 보면, 번역이란 본래 대중이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을 지녔다는 말로 들린다.

 

이에 진 교수는 “실제 두 경우 모두 노력과 품, 시간과 경비의 사용이 엇비슷하다. 대중을 위한 번역이 그저 원전을 쉽게 풀이하면 될 것이라는 단선적 사고에 빠져, 번역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실제 해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해명한다.

 

곧 대중 번역에는 “번역의 대중화에 한글 어휘 선택문제, 문체의 문제, 주석의 문제, 한문과 한글 어문질서의 차이문제, 한문고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개념어를 표현할 때 나타나는 문제 등 다양한 난제”등의 고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언급된 문제들이 대중번역에만 해당이 되는 문제인지는 여러모로 의구심이 든다. 학술번역에도 한글 어휘 선택, 문체, 개념어 표현 등의 문제가 등장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논문 말미가 이렇게 다소 방향을 못 잡고 있는 이유는, 학술번역과 대중번역에 대한 개념 및 범위 규정과 혼란스런 관계에 대한 해명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역을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한 물음만으로도 벅찬데, 또 다른 고민의 짐까지 떠 앉아야할 형편인 셈이다. 그러나 어쩌랴. 본래 모든 고귀한 것들은 어렵고 드문 것을.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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