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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시각] 더 큰 틀에서 죽음 定義를 논의하자
[철학자의 시각] 더 큰 틀에서 죽음 定義를 논의하자
  • 오진탁 한림대·동양철학
  • 승인 2008.12.23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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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에서 의학의 발달에 따라 전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뇌사, 식물인간, 안락사, 존엄사, 임사체험, 호스피스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현상들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죽음 이해와 개념규정의 방향에 따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나 터부 등을 야기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방식까지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므로, 죽음에 대한 개념정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 物化되고 量化되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습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인 일로 다뤄지면서, 죽음담론은 종교에서조차 중요한 일들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먼저 죽음 정의라는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블랙 법률사전』 4판에서는 죽음에 대한 전통적 정의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 생명의 중지. 존재하기를 멈춤. 혈액순환이 체계적으로 멈췄으며 그 결과로 호흡, 맥박과 같은 동물적 생명 기능이 정지했다고 의사가 규정한다.”

또 하버드대 뇌사위원회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로운 죽음정의에 의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이전 보다 이식에 필요한 장기의 활력 조건이 크게 향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뇌는 죽었지만 다른 장기는 유용한 상태인 한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라고 말하면서 분명히 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새로운 죽음정의로 생명을 구합니다. 새로운 죽음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장기이식이 훨씬 활성화됩니다. 죽음을 이렇게 제멋대로 정의해도 되는 것일까요. 인간이 어디 뇌만의 존재, 육체만의 존재인가요. 이런 죽음정의에 의해 장기이식은 활성화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잘못된 죽음정의에 의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죽음도 실용적 측면에서 정의된다면, 인간존재는 육체만의 존재로 물질화돼 현대 사회의 물신주의 풍조는 더욱 가속되고 생명경시는 한층 만연될 것입니다. 그로 인한 비극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죽음정의 문제를 다루는 의학과 생명윤리 관련문헌을 조사했더니, 심폐사와 뇌사 등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만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정의 문제에 철학적, 종교적으로 폭넓게 접근해 바람직한 방식으로 죽음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고, 실용적 차원에서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라는 의학적 문제로 축소됐습니다. 심폐사든지 뇌사든지 이런 논의는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과 관련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음 정의 문제인 양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 문제는 인간의 육신에 초점을 맞추어 단지 의료적인 문제, 법적인 차원에 한정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단지 뇌사, 심폐사 같은 의학적 차원의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의 문제로 축소되니까, 사람들의 죽음 이해 역시 육체 중심으로 한정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성숙한 죽음문화 부재 현상과 죽음에 대한 오해, 그리고 자살사망률 급증은 이와 같은 육체 중심의 죽음정의와 관계됩니다. 죽음 판정의 육체적 기준 제시와 죽음판정의 기준충족 검사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보다 큰 틀에서 죽음정의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차분히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으면 다 끝나는지, 영혼의 존재 여부 같은 문제는 현실적으로 의견차이로 인해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의견 차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다양한 의견을 폭넓게 제시하기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건강에 4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인 건강. 최근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영적인 건강을 추가시킴으로써 우리의 건강에 당연히 영혼이나 영성, 영적인 문제가 결부돼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건강에 영적인 건강을 포함해 4가지 측면이 있다면, 죽음도 당연히 4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생명 혹은 영혼의 문제라는 보다 큰 차원에서 죽음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으로서 존엄한 죽음은 어떤 죽음이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먼저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서양에서 생사학을 창시한 퀴블러 로스도 “진짜 문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한 참된 정의를 갖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고 의대생과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는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에 부딪혀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보살핀 경험이 있는 그는 아주 확실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육신은 껍질에 불과하고, 죽은 사람의 육신은 봄이 돼 더 이상 필요 없어 벗어 던진 겨울 외투처럼 보여 졌습니다.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은 더 이상 그 껍질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시체가 남는 것이지만, 사람은 죽더라도 존재의 양식만 바꿀 뿐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죽음이란 육신의 옷을 벗는 행위”고 말합니다. 티베트어로 육신은 ‘뤼’라고 불리는데 수하물처럼 사람이 떠난 뒤에 남는 것을 의미합니다. ‘뤼’라고 말할 때마다 티베트인들은 인간이란 이 삶과 육신에 잠시 머무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뇌사나 심폐사처럼 죽음판정의 육체적 기준만으로 정의될 수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됩니다. 육체 중심의 죽음판정 기준이 죽음정의를 대신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죽음문화가 성숙될 수 없고 자살처럼 불행한 죽음만 양산될 뿐입니다.

사후의 삶에 대한 연구결과,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단순히 이 세상에서의 생존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퀴블러 로스는 말합니다. 이제 죽음 정의는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혼, 정신, 삶의 의미같이 순전히 물질적인 삶과 생존 이상의 무언가 지속되는 것이 있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오진탁 한림대·동양철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자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죽음』등의 저서와 「죽음치유」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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