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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중립성의 신화를 깨는 저작들
[북리뷰] 중립성의 신화를 깨는 저작들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12.11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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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스의 과학』김명진 지음│사계절│2008│252쪽
『프랑켄슈타인의 일상』 백영경·박연규 쓰고 엮음│도서출판 밈│ 2008│ 309쪽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풍요로움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동시에 그 부정적 부산물과 문제점을 간과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출판계에는 과학기술을 배태한 사회적 배경 또는 과학기술이 배태한 시사적 쟁점을 다루는 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지구 온난화 논쟁, 황우석 사태, 광우병 파동 이후 과학기술의 사회적 쟁점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출판사들의 호응은 더욱 고조되는 감이 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수많은 쟁점들 가운데 무엇을 다뤄야 할지, 독자들 입장에서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될 수 있다. 모든 분야, 모든 주제에 대해서 책을 내고, 그것을 사 보기에는, 출판사나 독자들이나 그렇게 여유가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책들은 특정 주제가 아니라,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들과 쟁점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출판사와 독자들의 고민을 덜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과학기술시대의 교양서들이라고 할 법하다.

『야누스의 과학』에서 저자는 “오늘날의 과학은 사회적 진공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다양한 주제들을 통해 조망하고 있다. 저자는 원자력, 디지털 컴퓨터, 인터넷, 우주개발, 살충제,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 환경 호르몬, 생명공학 등 여러 쟁점들을 다루고 있다.
살충제의 경우를 보자. 저자는 화학적 살충제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크게 두 가지 계기를 통해 확대됐다고 본다. 첫째는 전쟁 시기 폭발물 제조나 군복, 텐트, 붕대 등의 생산에 쓰이는 면화의 수요 증가와 해충인 면화씨비구니의 창궐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는 전쟁 중 교전 양측이 사용한 독가스가 살충제 개발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전쟁 중에 유행한 곤충 매개 전염병의 유행도, 곤충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후 살충제는 거대 화학 산업계와 정치권의 카르텔에 의해 확대 생산되기에 이른다.
저자는 이를 통해 살충제의 과학과 기술이 곤충을 죽이고, 전쟁에 봉사하며, 급기야 자본을 등에 업고 사람들의 생명조차 위협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쯤 되면 과학기술이 중립적이라는 말은 ‘거짓명제’ 넘어서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야기할 정도가 된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침묵의 봄』을 저술한 레이첼 카슨의 합성살충제 반대운동이 “현대 환경운동을 태동시킨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과 자연-인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 등의 계기를, 바로 과학기술의 부정적 부산물들이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는 과학기술을 둘러싼 쟁점이 결코 일면적이지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살충제 문제만 해도 “말라리아의 위협과 살충제의 위협 중 어느 쪽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한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기술만이 아니라, 순수과학 연구라 자처하는 분야에서도 과학의 중립성이라는 신화는 나이브하다.

저자는 지구과학에서 판구조론의 정립이 “냉전 하에서 군사적 지원을 등에 업고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석탄·가스·석유 매장지의 탐사를 위해, 1960년대에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의 이행 여부를 상호 감시하기 위해, 그리고 순항미사일의 설계와 유도에 필요한 지구물리학적 측정 등등의 이유로 군대는 지구과학자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지구과학자들은 그 덕택에 값비싼 장비와 지원을 등에 업고 비약적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도 이 연구과정을 순수하고 중립적이라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생명공학기술은 ‘의도적인 악용’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제가 더 심각하다. ‘생명공학시대의 건강과 의료’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의 일상』은 생명공학 기술이 얼마나 그로테스크한 수준으로 변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리모, 의료관광, 성장호르몬, 난자소송 등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쟁점을 저자들은 찬찬히 따져보고 있다.

예를 들어 성장호르몬을 보자.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도발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성장호르몬 약품들은 몸을 통해 가해지는 낙인과 차별에서 사람들을 과연 자유롭게 해주는가.”
이에 대한 저자들의 답변은 부정적인데, “결국 정상적인 키를 표시하는 150, 160과 성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키를 표시하는 168, 187이라는 숫자들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성장호르몬 약품은 기존의 사회가 만들어낸 이 숫자들 자체는 바꾸지 않으며 그에” 기대기 때문이다.
흔히 진보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과학기술이 진정한 인간관계의 진보, 가치관의 혁명보다는 기성의 차별과 不義를 재생산하고 증폭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저자들은 암시하고 있다. 이는 특히 생명공학과 자본주의의 결합에서 두드러진다.

황우석과 줄기세포 파동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인간을 불치병과 장애에서 해방시켜줄 새로운 기술의 맹아가 출현한 것이라며 흥분을 했었다.
그리고 그 기술의 막대한 금전적 이윤을 강조하며 찬양했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것과 막대한 이윤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가치들이다.

저자 중 한 사람은 책의 말미에서 “시장경제 속에서 연구·제공되는 건강에 대한 유전학적 접근은, 연구자와 정책입안자, 대중이 의료를 우선적으로 질병을 가진 개인들을 ‘고치는’ 과정으로 바라보게 하고, 건강이란 사회가 지향해야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보다는 개인 소비자들에 의해 시장에서 사고팔려야 하는 무언가로 여기게”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는 “건강이 생명공학연구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이는 병 주고 약 주는 상황을 낳는데, 저자는 “줄기세포연구의 목표 중 하나인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낮은 수준의 노출일지라도 살충제, 제초제 또는 공업용 용제에 노출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구와 이에 따른 연구지원금들은 먹이사슬에 스며든 수많은 합성오염물질들을 무시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노출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혹은 결부된 숱한 부정적 산물과 쟁점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돌아온 길을 반추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곧 들판의 소처럼 느긋하게 과학기술사와 현대문명 그리고 삶에 대해서 소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대 자본과 첨단 연구소와 무심한 관료주의의 톱니바퀴 어디에서 사유를 위한 시간을 찾을 수 있을까.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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