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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상상적 시간으로 끌고가는 낙관적 형이상학이다
문제는 상상적 시간으로 끌고가는 낙관적 형이상학이다
  • 정지은 홍익대 강사·철학
  • 승인 2008.12.11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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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미학』이지훈 지음┃이학사┃2008┃ 350쪽

예술과 미와 관련된 담화만큼 지성을 곤궁에 빠뜨리는 담화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담화는 사랑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예술과 미에 대한 모든 연역적 사유 시도가 늘 마주하는 대상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러한 사랑이 관계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제시하는 미로서의 진리도 에로스적 욕망의 단계들이 그리워하는 대상이지만 그 대상은 증명을 위해 미리 설정돼 있지 않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아름다운 것이 진솔하게 또 자유롭게 스스로 아름답다고 자백하는 동안에는 그 아름다운 것은 볼 수 있게 비쳐지고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존속한다(『독일 비애극의 원천』).” 오성은 이러한 비쳐짐으로써만 제시되는 아름다움의 부름을 받고 그곳으로 향하지만, 이러한 이끌림은 소유를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랑하기 위한 이끌림이다.
『존재의 미학』의 저자는 “존재가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존재의 미학을 더듬어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존재들은 세계에 속하지만 세계는 존재들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존재들의 관계는 세계를 그려내지만, 그 세계는 무한이라는 역설적인 부정성을 함축한다는 말이다.

광휘의 세계에서는 ‘완성과 절대성의 감각’이 느껴지지만, 무언가 존재하지만 발현되지 않은, 가련한 ‘어여쁨’의 세계에서는 ‘생성의 힘’이 느껴진다. 이것이 실로 어여쁨의 미학이고 아름다움의 참모습이다. 완성됐다고 믿는 순간에 사랑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가 세계와 일치하는 순간 아름다움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것을, 완성이 곧 파멸을 의미하는 사랑과 비교해도 될까.
그리고 부정성을 전제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이 맞닿아 있다고 해도 좋을까. 만약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저자는 사랑의 행위와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 가지는 두 성질을 생명 자체를 구성하는 자발성과 그러한 자발성을 촉발하는 무한한 세계의 否定性과 연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즉 세계의 부정성은 행동의 삶을 촉발하고 그 가운데 아름다움이 태어난다. 그런데 사랑의 상태가 언제나 환희에 차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존재가 세계와 맺는 관계가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닮지 않은 닮음’, ‘얼굴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벗어나는 얼굴’로 향하는 예술가의 노력에는 어김없이 이중의 고통이 따라온다. 자신이 만들어낸 닮음의 모델과 일치하는 자아의식을 포기해야만 하는 고통과, 잡아먹음과 잡아먹힘이 뒤섞이고 무차별한 ‘살’로 추락하는 죽음의 위협이 가져오는 고통이 그것이다.
전자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괴물의 고통이고 후자는 『수호지』에 나오는 인물인, 채마밭을 가꾸면서 인육을 만드는 장청의 고통이다. 쇼펜하우어는 생의 의지를 잠재우기 위해서 내부와 외부의 합일이라는, 지루한 ‘심미적인 상태’를 설파하면서 이러한 고통에 굴복했다. 그러나 저자가 원하는 것은 뜻마저 사라져버린 무위의 상태가 아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심미적인 상태는 생의 체념, 혹은 죽음의 상태를 담보로 하는 치료제의 역할만 할 뿐 표현과 창조의 욕망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는 생의 충동을 감당할 수 없다.
저자에 따르면, 절대적인 생의 흐름은 과도함과 경계의 겪음을 조건으로 하는 항속적인 창조의 과정이다. 그래서 예술가에게 있어서, 결절의 경험을 형성하는 창조의 순간은 니체의 ‘정오’에 비유될 수 있다. 니체의 정오는 합일과 동시에 분열이 일어나는 순간, 몰입과 동시에 새로움이 창조되는 순간이며, 이러한 순간은 고통이 또 다른 고통에 의해 추월되지 않는, ‘비극적 희극’을 낳는다.
비극적 희극은 내면 안에서 타자성의 모습으로 (비)계시((non)r、ev、el、e)되는 외부와의 접촉에 의한 ‘존재의 원천과의 재결합’, 혹은 ‘존재의 연쇄’이다.

근대 이후의 자폐증적 예술가들은 내부 깊숙이 들어가 자신의 외부를 발견하고 세상에 내어놓지만, 내어놓은 작품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다. 개성은 익명성과 더불어 있게 되는데, 왜냐하면 예술가들이 자신의 외부(이자 내부의 심층)로 내보인 것은 ‘의미’가 아닌 ‘생의 흐름이 기록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아니기에 우리는 작품을 해석할 수 없고, 대신에 ‘전인격적 장’에서 그것에 공감한다. 그리하여 존재의 원천에 가 닿음으로써 개성이 참된 보편성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연쇄가 발생한다. 자발적 생의 흐름의 기록은 바로 세계의 분출이고, 이것을 저자는 ‘우연한 寫出’이라고 부른다. 세계를 모방하되, 모방된 것이 세계 자체의 분출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는 들뢰즈의 존재론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개인을 넘어서는 생명의 장이 갖는 힘의 논지나 全시간적 시간, 혹은 시간의 뒤섞인 구조 안에서의 잠재성, 죽음을 지속적인 생성의 운동 가운데의 한 매듭으로 보는 관점 등은 저자가 계속해서 주장하는 삶의 선, 자연, 존재의 원천으로의 회귀 근거가 된다. 알 수 없는 세계, 재현의 틀을 벗어나는 세계의 무한성은 생명의 장이 갖는 힘의 상관항이다. 세계의 무한성이 생명에 무한한 힘을 부여하고, 거꾸로 생명의 무한한 힘이 세계를 무한하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무한한 힘은 개인을 넘어섬과 동시에 개별 주체를 만들어낸다. 주체와 세계가 완전한 긍정성에 의해 떠받쳐 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결론의 제목인 ‘오래된 미래’가 암시하듯이 前미래적 시간을 전제로 한다. 전미래적 시간 안에서, 되는 것은 이미 과거에 돼야 할 바로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가능성이 되고, 현재는 미래에 대해서, 미래의 전적인 가능성을 지닌 과거가 된다. 모든 시간이 늘 과거의 관점에, 잠재된 가능성의 관점에 붙들려있다. 잠재성과 가능성이 모든 우연성을 잡아먹는 양상이다. 여기에는 어떤 불가능성도, 부정도, 결여도 그 자체로 있을 수 없다. 저자도 생명의 힘에 의한 생성의 장을 ‘필연적 우연’의 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이러한 전미래적 시간성에 의한 사유는 저자가 들뢰즈의 말을 빌려 비판했던 헤겔의 경직된 보편성에 의한 ‘퇴행의 위험’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아닐까. 경직된 보편성은 현재만을 위협하지만 전미래적 시간에 의한 사유는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포섭하려는 이론적 위험성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퐁티가 경계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철학적 태도, 즉 무한을 긍정적 무한으로 만드는 태도였다.

그가 자연에 대한 스피노자의 생각에 동의했음에도 스피노자적 무한의 긍정성을 비판했던 이유는 그러한 철학적 결론이, 다른 무엇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부정성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서였다.
앞서 말한 위험은 세계와 예술가에게도 적용된다. 무한성으로 정의된 세계는, 자신이 생성되는 것을 지켜보는 도착적 세계이다. 세계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인간이 자기를 그려내는 것을 만족하면서 바라본다. 인간에게 생성의 힘을 불어넣는 세계의 수수께끼는 세계 쪽에서 보면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그러할 때, 인간이 생성의 흐름에 참여함으로써 세계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상상적 기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인간-예술가는 불가능과 맞닥뜨릴 때, 라캉이 말하는 가능성과 가능성의 모서리에 서 있을 때만이 진리를 일별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미학』은 ‘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만큼, 감성적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서술의 이면에는 심오한 존재론이 숨어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것, 우리를 현실적 현재가 아닌 다른 곳, 상상적 시간으로 끌고 갈 수도 있을 낙관적 형이상학이다.

정지은 홍익대 강사·철학

프랑스 부르고뉴대에서 메를로 퐁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한 저자의 대표작에는 『기억과 몸』 등이, 논문에는 「감각 세계의 역동성과 은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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