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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티브에 빛 바랜 ‘진리탐구’
인센티브에 빛 바랜 ‘진리탐구’
  • 강수돌 고려대·경영학
  • 승인 2008.11.17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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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사회의 경쟁, 이대로 좋은가

‘철밥통’이란 말이 있다. 던져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밥그릇이다. 공무원이나 교사, 교수처럼 안정된 직장에 안정된 소득을 가진 집단을 일러 철밥통이라 한다. 그 철밥통이 이제 깨지고 있다. ‘철밥통’이 깨지는 것을 잘된 일이라 볼 수도 있다. 특히 속이 훤히 보이면서도 깨지기 쉬운 ‘유리밥통’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나 아예 헌 밥통조차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 참, 고소하다”고 할 일이다. 또 “낡은 노트 하나 가지고 정년 때까지 재탕 삼탕 하는” 그런 꼴을 그만 보게 돼 좋다는 이도 있다. 더군다나 ‘무한 경쟁’ 시대에 ‘수월성 교육’이나 ‘대학 경쟁력’ 차원에서 “시급하고도 필수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교수 사회에도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초중고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2010년부터 전면화한다는 ‘교원평가제’도 마찬가지다. 2009년부터는 대학 단위의 지원을 교수·연구자·학생 단위로 바꾼다. 경쟁은 이렇게 이미 치열하다. 다 좋다. 하지만 여기도 함정이 있다.

첫째, 과연 교육자 또는 연구자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누가 그 능력을 측정하며 어떤 기준에 따라 측정하는가. 현재는 상급 학교 또는 직장 상사가 측정하거나 해외 학술지가 측정한다. 그리고 현재는 얼마나 상급 학교에 진학을 많이 시키는가, 얼마나 좋은 직장에 취업을 많이 시키는가, 얼마나 국내외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많이 싣는가가 측정 기준이다. ‘남들이 알아주는’ 상급 학교나 직장에 진출을 많이 못 시키거나 국내외의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을 싣지 못하면 과연 ‘능력’ 없는 교육자 또는 ‘무능’ 교수일까. 당장 취업에 도움이 안 된다고 경쟁력 없는 학과라며 폐지한다면 과연 참된 학문과 진리 탐구를 말할 수 있을까. 생각건대, 학생들이 겉으로 보이는 결과보다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내면의 성장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꿈과 소질에 주목하는 교육자야말로 참된 교육자다. 남들의 시선이나 눈치를 보기보다 소신과 줏대로 사는 것이 옳다.

둘째, 이미 일부 대학들이 하고 있듯, 교수들에게 경쟁을 시키고 인센티브를 주어야 교육과 학문을 더 잘 한다고 하면 이미 ‘자발적 동기’가 부재한 것이다. 반면 네거티브 인센티브나 재임용 탈락으로 신분을 불안하게 해 “생존하려면 열심히 하라”고 협박을 하는 경우 참된 진리 탐구는 불가능하다. 원래 진리 탐구 학문이란 스스로 즐겁거나 의미가 있어 하는 행위다. 대부분의 대학이 ‘진리’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진리 탐구라는 의미 있는 사회적 행위가 경쟁이나 인센티브 등 외재적 동기에 의해 촉발된다면 이미 그건 빛을 잃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리보다는 인센티브에, 제사보다는 젯밥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나는 척박한 한국의 현실에서조차 교육이나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후한 대접을 받는다고 본다. 때로는 지나치게 후하다. 백번 양보해서, ‘먹고사는’ 것에 쪼들리진 않는다. 그런데도 수당이니 성과급이니 인센티브니 하는 것들을 한사코 더 받아야 하는 것처럼 설치는 이도 이상하고, 이를 강제하는 당국의 행위도 이상하다. 물론, 그런 거라도 않으면 안주하거나 나태해지기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것조차 “학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 힘써 나아가지 않으면 곧 떠밀려 내려간다”는 옛 어른의 말씀을 되새기며 진리 탐구에 정진하는 연구자 본인에게 맡겨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연구와 교육이 가능해진다. 굳이 평가를 하려면 해당 학생들에게 맡기면 된다.

셋째, 교육의 국가경쟁력이나 대학의 국제경쟁력 따위의 말들은 결국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사다리 질서 안에서 가능한 한 높이 올라가 남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더 많이 누리려는 욕망일 뿐이다. 최근 부활한 초등학교 일제고사,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중고교 전국학력평가, 세계적 국제학력평가, 범지구적 세계 100대 대학 순위, 이 모두는 결국 1등부터 꼴찌까지 ‘경쟁의 덫’ 안으로 옭아매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일단 경쟁이 벌어지면 ‘왜 하는지’를 묻기도 전에 ‘무조건 1등을 하고 봐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게 모두 경쟁이라는 게임에 참여하는 순간 그 참여자 모두는 누가 일등 하는가와는 관계없이 그 경쟁을 불러들인 세력에게 모두 지배당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어떻게 지배당하는 걸까. 우선, 누구에게 지배당할까. 교육이나 연구가 참된 진리를 논하지 못하도록, 참된 진리 탐구 대신 무한한 돈벌이 추구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려는 세력에게 지배당한다. 그것이 바로 자본이고 자본의 이해 대변 세력이다. 그럼 어떻게 지배당한다는 것일까. 경쟁 참여자들이 더 많은 떡고물을 가져가기 위해 혼신을 다해 경쟁에 돌입하는 순간, 그들은 진리 탐구 경쟁이 아니라 돈벌이 경쟁에 동참한다. 처음부터 그 경쟁의 사다리는 돈벌이 경쟁을 위한 사다리였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갈수록 참된 학문 탐구, 즉 진리 탐구는 뒤로 밀리고, 오로지 돈벌이 추구, 경쟁력 강화만 전면에 나선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나라와 모든 대학을 무한 경쟁의 게임 안으로 편입시켜 결국에는 모두를 장악하는 자본의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이 사태의 진실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남보다 약삭빠르게 사다리를 높이 올라가는, ‘팔꿈치 사회’의 발 빠른 적응자가 되기보다는 팔꿈치 사회의 반생명적, 비인간적 사다리 질서 자체를 보다 인간적인 ‘원탁형 구조’로 바꾸는 창조자가 되길 원한다. 나는 모든 대학이 말로만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봉사 등을 내세우며 ‘브랜드 가치’로만 널리 홍보하는 그런 곳이기보다 대학 행정이나 교육, 연구, 봉사 등 일거수일투족 모든 과정에서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봉사에 부합하는, 그리하여 명실상부, 언행일치, 지행합일의 선구자가 되길 소망한다. 바로 이런 면에서 “이제 더 이상 ‘철밥통’이 없어진다”는 말에 절반은 동의하면서도 절반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강수돌 고려대·경영학

필자는 독일 브레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등이 있다. 현재 신안 1리 마을 이장, 사회공공연구소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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