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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논리에 맞선 상아탑 知性 … 비판적 이성 옥죄는 신분불안의 그림자 깊어지다
시장논리에 맞선 상아탑 知性 … 비판적 이성 옥죄는 신분불안의 그림자 깊어지다
  • 최성욱 기자
  • 승인 2008.11.17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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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비친 교수사회의 변화

<교수신문>이 창간된 1992년 4월의 봄은 교수들에게 혹독한 겨울의 연속이었다. 학문의 자유와 대학의 민주화는 당시 대학사회의 절박한 화두였고, 교권옹호와 학자로서 권위를 스스로 지켜내는 것은 교수사회의 절박함이었다. <교수신문>이 걸어 온 15년의 세월에는 교수사회의 역동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만만치 않았던 15년 동안 교수사회는 어떤 부침을 겪어왔을까. 몇 가지 주제어를 꼽아 보았다.

1992년 교수사회의 難産 <교수신문>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걸고 출범한 노태우 정부의 국정기조는 ‘안정속의 개혁, 민주주의의 실현’이었다. 대학 교육정책에서 ‘자율성’을 강조하던 노 정부는 1990년 3월, 사립학교법을 손질했다. 개정된 사립학교법의 핵심은 △교수재임용제 완화 △교직원 임면권 재단 이양 △재단 이사장 친인척 학교장 허용 등이다.
이듬해 8월 ‘교육공무원 임용령’을 통과시키면서 노 정부의 ‘대학 자율성’에 밑그림이 완성된다. 교육공무원법에 따라 보장돼 있던 교원의 임용을 대통령령으로 끌어내렸다. 법령에 따라 교원의 임용은 국무회의의 손으로 넘겨졌다. 임용령에는 ‘정년보장교원정원제’가 포함됐다. 대학 교원의 정원 권한이 교육부로 이양된 첫 번째 법적 근거다. 개정령은 교수가 정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별도의 자격심사를 받도록 규정했다. 교수사회가 극도로 움츠러드는 가운데 학내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교수들이 재단에 의해 강제해직 당하는 일이 속출했다. 사립학교법 개악과 교수들의 법적지위 격하 등 악화일로의 교수사회는 <교수신문>을 탄생시켰다.

IMF
1998년, 외환위기의 후폭풍이 대학가에 몰아쳤다. 등록금이 동결됐고, 기부금 지원은 끊겼다. 정부 예산이 11조원 삭감됐으며, 오를 대로 오른 환율 탓에 대학은 환차손까지 고스란히 떠안았다. 박창엽 당시 연세대 공대학장의 말에 의하면 연세대의 산학협동 프로젝트가 전년대비 1/5로 줄었다.
교수 채용시장도 얼어붙었다. 성균관대의 경우 초빙공고에 110명을 내고 절반에도 못 미치는 49명을 선발했다. 경희대는 신규 임용 계획 20명 중 15명을 선발했는데 전임은 5명에 불과했다. 국책 연구소도 채용을 대폭 줄이거나 채용을 보류하는가 하면 합격을 취소시키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일부에서는 “재단의 경영부실을 IMF로 인한 재정난으로 덧씌우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전가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학부제
학문의 다양화를 꾀하며 1995년부터 시행된 학부제는 기초학문 부실화 등 시행초기부터 지금까지 진통을 겪고 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2010년부터 학부제를 폐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학부제 실시 이후 학생들의 전공 선호도가 가시화됨에 따라 인문·사회·자연계열 등 비인기학과 교수들에게 학부제는 신분불안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학부제는 학문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가중시키면서 교수신분에 직접적인 변화를 야기 시켰다.
이시우 전 서울대 교수(천문학과)는 <교수신문> 제141호(1998년 9월 14일자) 원로칼럼 ‘학부제 유감’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교수는 “학부제는 단순한 행정상의 변화를 줄 뿐이지 예산상의 지원과 같은 내실 있는 개혁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서 “교육정책은 빈곤한데 정책을 위한 정책교육만 난무한다”고 꼬집었다.

신지식인 논쟁 
1999년 2월 김대중 정부가 국민 개개인의 창의력과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시작한 신지식인 운동이 적잖은 학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지식인 논란의 핵심은 정체성이었다. 정부가 처음 선발한 신지식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대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하다보니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정부는 지식인상을 경제적 지식인으로만 한정시키고 있다. 정부는 민간이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프라 조성에 힘써야한다”고 반박했다.
반면 “신지식인론에 대한 반발은 지위손상에 따른 지식인들의 불쾌감이 아니냐”며 교수사회 혁신을 말하는 쓴소리도 있었다.

교수계약제
1998년 이해찬 당시 교육부장관은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교수임용제를 계약제로 바꿔 교수들이 연구업적을 쌓고 좋은 강의를 하도록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교수사회는 일대 파문에 휩싸였다. 이 장관의 발언은 부교수 이상의 교수에 대해 정년을 보장해 주고 있는 교수정년보장제와 조교수 이하 교수들의 기간제임용제(재임용제)를 능력별 평가에 따른 ‘계약제’로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계약제의 기준이 될 연구업적평가가 강화되는 동시에 신분불안은 가중되는 이중고에 놓인 교수들의 반발이 거셌다. 파문은 이듬해 현실로 나타났다. 1999년 1월 교육부가 제출한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이 여당 단독으로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2002년부터 국립대 교수의 임용방식이 계약제로 바뀌게 됐다.
이후 승진·승급심사가 강화되면서 직급정년이 도입돼 일정기준을 채우지 못하고 대학을 떠나는 교수들이 늘어나면서 “대학교수, 철밥통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BK21
시행 초기, BK21에 불신을 나타낸 교수들은 ‘서울대 밀어주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1996년 서울대특별법 추진 당시 국가거점대학, 입학제도 개선(고교장추천제), 지원금 1조4천억 원 등 중점사안이 일치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과)는 BK21사업에 대해 “지방대는 학부중심으로, 중앙의 소수 대학은 대학원 중심으로 육성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며 성토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출범
교수계약제와 연봉제의 도입에 따른 교수신분과 권익의 보호를 위해 전국교수노동조합(초대위원장 황상익 서울대·의과대)이 2001년 11월 출범했다. 당시 전체 교수의 규모는 약 7만명 정도(전문대 포함). 출범 초대 조합원은 1천4명에 불과했다. 대체로 심정적 동의는 있으되 조합원 가입은 꺼리는 분위기였다. 노조에 대한 교수사회의 불신은 참여 구성원의 불균형으로 나타났다. 조합원 가운데 사립대 교수가 80%이상이었고, 그 중에서 인문사회계 교수가 61%, 이공계 교수가 20%였다. 젊은 교수의 참여가 부진했고 서울 소재 주요 사립대 교수들의 참여는 극히 미미했다. 교수노조 결성에서도 교수사회에 팽배한 신분불안의 심리가 반영됐다.

대학 구조개혁 방안
2004년 12월, ‘대학은 산업’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추진된 대학구조개혁방안은 국립대를 중심으로 본격화 됐다. 국립대는 대학운영 시스템 개혁을 목표로 권역별 통·폐합에 이어 국립대 특수법인화, 총장 간선제 원칙이 추진됐다. 특히 2005년 9월, “국립대 특수법인화 이전에 교육재정부터 확충하라”며 국립대 교수 1천여명이 서울 시내에서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비정년트랙
2002년 연세대가 처음 도입한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제도가 2005년 들어 전국대학으로 확산됐다. 교육부는 교수신분 불안 초래, 단기계약의 확대, 악용의 소지 등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대학간 이동성 제고와 교육과정의 탄력적 운용을 들어 비정년트랙 교원을 ‘전임교원’으로 인정했다. 이에 따라 대학은 교원확보율을 올려 대학평가지수를 높이는 데 악용할 수 있게 돼 교수의 신분 불안은 한층 심화됐다. 전임교원제도의 위법성 논란, 계약 만료 교원의 소송 제기 등 비정년트랙 제도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시간강사의 죽음
2003년 5월, 서울대에 출강하는 시간강사 백 씨(당시 34세)가 서울대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고 숨졌다. 시간강사의 생활고와 교수임용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음달, 학술단체협의회 교수들이 박사 실업자에 대한 정책융자제도 도입과 정부 지원금 증액 등을 내걸고, ‘시간강사 처우개선을 위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민수 서울대 교수 복직 판결(2005년 1월)
김민수 서울대 교수가 7년에 걸친 재임용탈락 소송 끝에 승소하고 다시 강단에 섰다. ‘대학 교원의 재임용 거부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오랜 판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교수의 법적 지위를 확인한 셈이다.
세종대 김동우 교수의 복직과 해직교수의 구제절차 마련은 대학의 임용권 남용에 제동을 거는 성과를 남겼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대학자율화정책
이명박 정부가 표방하는 교육정책 기조는 ‘대학자율화’이다. 3단계 대학입시 자율화, 국립대 법인화,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육성 등 현재까지 진행상황을 보면 대략 밑그림이 나온다.
강의전담교수와 산학협력전담교수 등을 운영할 수 있도록 고등교육법을 개정한다. 또한 재임용 심사규정도 업무 특성에 따라 교육, 연구, 산학협력 등 일부만을 평가근거로 삼아 재임용 심사를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특히 직급별 최소 근무 연수 기준이 폐지됨으로써 사실상 ‘단기계약제’로 이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밖에도 신규교원임용 공고 기간 자율화, ‘동종교배’제한 규정 완화 등을 통해 교수신분 불안, 교수계약제 등이 한층 더 강화될 전망이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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