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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여교수의 고백
● 어느 여교수의 고백
  • 교수신문
  • 승인 2002.02.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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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2-18 00:00:00
얼마 전 편집국에 ‘이혼한 여교수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이 전해졌다. 익명으로라도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자 했던 여교수의 상황은 그만큼 절박했고, 우리신문은 실명표기의 원칙을 깨고 글을 편집해 게재하기로 결정했다.

저는 2000년을 보내며 첫 결혼의 기억들을 함께 접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선택해서 결혼을 했고, 그 선택을 다른 선택으로 바꾼 것이 큰 잘못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저는 다른 사람이 아닌 제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찾고 싶어졌습니다.

이혼을 하게 되자 저를 잘 알고 있고, 젊은 날에 이혼한 후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외국인 교수는 제게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기라고 했습니다. 그 여교수님은 이미 오랜 기간의 한국 생활을 통해서 한국에서의 이혼이, 더구나 여자의 이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국인 교수의 당부를 지키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하는 대신에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숨어서 산다는 것은 결국 그 어떤 것도 해결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교수인 제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죽도록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아이디어가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어쨌든 업적이라는 열매로 맺어졌습니다. 몇 편의 논문들을 국내와 국외 잡지에 게재했고 여러 작품 등의 번역 작업도 하였으며 작은 책들도 몇 권 만들었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도 쉬지 않고 몇 년을 보냈습니다.

제가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전임강사 시절 교수 식당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키가 큰 여교수가 식사를 하러 혼자 식당에 들어섰습니다. 그때 그 교수를 설명하는 말은 이랬습니다. “저 선생은 이혼한 선생이에요.” 저는 순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느 과, 어느 교수가 아니라 그 교수는 단지 ‘이혼한 교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교수님의 모든 장점들을 다 덮어버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충격이 저에게 항상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혼한 교수’로 불리기보다는 ‘연구하는 교수’로 불리고 싶었기에 그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는 일이 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열심히 저를 변호하는 것은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우리 사회에서도, 특히 교수 사회에서도 이혼한 여자 역시 똑같은 구성원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단지 여자가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여자의 닉네임이 ‘이혼한 여자’가 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언젠가 저는 저의 초라한 연구 업적 뒤에서 당당하게 나와 ‘이혼한 여자’임을 밝힐 것입니다. 그때 제발 “그 여자가 당신이었어?”라는 말씀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진정한 동료가 되기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눈길로, 따뜻한 마음으로 맞을 준비가 아직 안되셨더라도 날카로운 말씀만은 꿀꺽 삼키는 넓은 가슴이 당신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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