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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 『지식인의 종말』(레리 드브레 지음, 강주헌 옮김, 예문 刊)
[쟁점서평] 『지식인의 종말』(레리 드브레 지음, 강주헌 옮김, 예문 刊)
  • 정수복 /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 승인 2002.0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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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8 17:44:09

지식인이 쓴 지식인에 대한 글은 모두 자기분석의 성격을 갖는다. 드브레는 이 책에서 그 자신이 1960년대 혁명가 체 게바라와 함께 남미의 민중해방을 위한 무장투쟁에 나섰던 지식인으로서 오늘날의 프랑스 지식인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 대상은 장기적인 역사의식도 없고 심층적인 전문지식도 없이 그때 그때 일어나는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신문과 방송의 관심을 끌만한 방식으로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는 데 혈안이 된 지식인들이다. 언론은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발빠르게 대응하며 현란한 말과 글을 쏟아놓는 ‘패스트 싱커’(fast thinker)들을 이용하여 소위 ‘여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드브레가 ‘최후의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집단자폐증에 빠져 있고 현실감이 없으며 비전이 부족하고 도덕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고 즉흥적이다. 드브레는 이들을 ‘기생충’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아예 사라져버리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지식인’ 이라는 말까지도 지워버리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첫째로 역자를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수많은 지식인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이루어지는 그의 비판의 화살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날아가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프랑스의 파리라는 좁은 땅에서 활동하는 지식인들끼리는 드브레가 비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한국의 독자들보다 쉽게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식으로 ‘최후의 지식인’ 가운데 대표적인 몇 사람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비판을 했더라면 이 책의 주장이 훨씬 명료하게 전달됐을 것이다. 두 번째로 드브레의 글쓰기 방식에 문제가 있다. 그는 최후의 지식인들의 현학적이고 허풍떠는 글쓰기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대안적 글쓰기의 방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비꼬는 그의 문체라든가 박학다식을 과시하는 장광설,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대는듯한 흥분한 문체는 오히려 독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독설과 풍자도 좋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성찰하는 글쓰기도 필요하다. 세 번째로 그는 최후의 지식인과 언론의 밀착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언론 비판보다는 지식인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문제의 근원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미디어에 있다.

드브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일간지와 주간지, 텔레비전과 라디오방송들이 자신들의 내부 입장에 맞는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식인들을 어떻게 동원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밝혔어야 했다. 즉 지식인비판에서 미디어비판으로 나가야 했다. 네 번째로 드레퓌스사건 당시 형성된 ‘최초의 지식인’을 찬양하고 오늘날의 ‘최후의 지식인’을 비판하는 데 그쳐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지식인 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잘못된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데 매몰돼자신을 포함한 제대로 된 지식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최후의 지식인’만을 던져버릴 것을 아예 지식인 집단 전체를 도매금으로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건강한 여론 형성을 위한 방법론이 없다. 사회주의가 막을 내린 오늘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개의 축이 됐다. 시장경제 속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이 강화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한 대화와 토론의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그래도 프랑스는 이 점에서 한국사회보다는 앞서있는 편이다. 그럼에도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가망 없는 사회로 비판하고 있는데 사회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움직이기 위해 언론과 지식인 그리고 시민단체와 시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론과 여론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이 땅의 지식인들이 고민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의 문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준 셈이다. 언론개혁과 지식권력, 텔레페서와 곡학아세, 인문학의 위기와 새로운 글쓰기, 고전적 지식인 모델의 붕괴와 새로운 지식인 모델의 정립이라는 문제들이 고스란히 우리들에게로 돌아오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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