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21:20 (금)
미국소설,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피츠제럴드는 인종·계급·성 차별 옹호했다”
미국소설,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피츠제럴드는 인종·계급·성 차별 옹호했다”
  • 김욱동 한국외국어대·영문학
  • 승인 2008.10.06 17: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 숨겨진 ‘제국의 욕망’

해질 날이 없다는 대영제국이 그토록 자랑하는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토머스 칼라일이 식민지 인도를 주어도 바꿀 수 없다고 호언장담한 셰익스피어. 바로 그 셰익스피어가 최근 들어 비판의 도마에 자주 오른다.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제국주의자에다 백인 우월주의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인종차별주의자요, 여성을 他者로 간주하는 남성중심주의자의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관심을 받고 있는 문화 이론가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해 내린 평가다.

사정은 흔히 ‘재즈 시대의 황제’로 일컫는 미국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사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윌리엄 포크너, 헤밍웨이와 함께 ‘미국 소설의 삼총사’로 불리는 그가 미국 소설사에서 차지하는 몫은 무척 크다. 그러나 최근 비평 이론의 시각으로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읽어보면 그 또한 백인 우월주의자일 뿐더러 가부장 질서를 옹호하는 남성중심자요, 계급의 잣대로 사람을 재는 보수주의자임이 밝혀진다. 최근 문학이나 문화 이론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인종·계급·性差를 둘러싼 문제다. 주로 이 세 가지 관점에서 텍스트를 읽어내려는 비평 이론이 바로 영국버밍엄대학의 현대문화연구소(CCCS)를 중심으로 모습을 드러낸 ‘문화 연구’이다.

처음에는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은 좌파 이론가들이 주장했지만 이제는 좌파와 우파를 가르지 않고 모든 문학 연구가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세 가지 의제는 이제 현대 문학과 문화 그리고예술 이론의 집을 떠받들고 있는 세 기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문화 연구가들은 전통적인 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눈여겨보지 않았거나 일부러 눈을 돌린 텍스트의 부분에 주목한다. 『소설의 제국』(소나무, 2008)에서 나는 문화 연구가들처럼 학구적 비평가들이 좀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부분을 꼼꼼히 눈여겨보려고 했다.

흔히 ‘위대한 미국 소설’로 일컫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그 동안 많은 학자들과 비평가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게 논의돼 왔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문화 연구의 시각으로 이 작품을 읽으면 작품의 의미는 창조의 새 아침처럼 신선하게 되살아난다. 미국 사회의 빛과 그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깊이 숨기고 있던 속살까지 훤히 드러낸다. 이렇듯 『소설의 제국』에서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비롯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미국 소설에 깊이 잠들어 있는 의미를 파헤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종래의 비평 방법으로 읽으면 피츠제럴드의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방향 감각을 상실한 ‘잃어버린 세대들’이환락을 좇아 방황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에 드러난 꺼풀을 하나만 벗겨놓고 보면 『위대한 개츠비』는 작가의 보수주의적 시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에는 유색 인종을 경멸하는 백인 우월주의를 비롯해 여성을 폄하하는 反페미니즘, 그리고 계급적 사다리의 아랫부분에 놓여 사람들을 멸시하는 계급주의가 굳게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피츠제럴드는 이 작품에서 톰 뷰캐넌의 입을 빌려 인종 차별주의를 은근히 드러낸다. 작품 첫 장에서 話者 닉 캐러웨이가 톰과 데이지의 집을 방문해 저녁식사를 할 때 톰은 닉에게 “지금 문명이 산산조각이 나려고 하고 있어. … 자네 고다르라는 사람이 쓴 『유색인종 제국의 발흥』이라는 책 읽어봤나?” 하고 묻는다.

닉이 아직 읽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톰은 “좋은 책이야. 누구나 다 읽어야 할 책이지. 책 내용인 즉, 만일 우리 백인종이 조심하지 않으면 백인종은 완전히 침몰해 버리고 만다는 거야” 하고 말한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백인종들끼리 서로 싸우는 동안 황인종이 세계무대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과 기술에서도 이제 서구 문명에 위협을 주었다. ‘황색 경고’란 바로 이를
두고 일컫는 용어다. 톰은 계속해 “지배인종인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다른 종족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거야” 하고 말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데이지가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타도해야 해요” 하고 맞장구친다. 톰이나 데이지에게황인종을 비롯한 유색 인종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지구촌의 한 식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경계하고 타도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톰 뷰캐넌에게 있어 그의 情婦 머틀 윌슨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주고 사고파는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뉴욕 시에 가는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머틀은 톰의 옷차림과 구두에 반하는 반면, 톰은 그녀에게서 아내 데이지한테서는 느끼지 못하는 육체적 박력에 매력을 느낀다. 이러한 사정은 데이지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톰한테 정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돈의 위력에 눌려 그와의 결혼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 다만 그녀는 때로 남편의 외도에 짜증과 조바심을 내고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화자 닉 캐러웨이가 데이지에게 화를 내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닉은 “내 생각 같아서는 데이지가 당장 어린애를 안고 집을 뛰쳐나와야 했지만 ― 분명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한다. 데이지는 톰의 외도를 눈감아줄망정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없다.

더구나 여성인 데이지는 남성중심의 가부장 질서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그 제도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한다. 첫딸을 낳을 때 데이지는 간호사에게 금방 낳은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물어본다.

간호사가 딸이라고 알려주자 데이지는 “딸이라서 좋아. 그리고 이 아이가 커서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어. ― 그렇게 되는 게 계집애가 이 세상에서 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니까. 아름다운 바보가 되는 것 말이야” 하고 말한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딸아이가 자라서 ‘아름다운 바보’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남녀평등과 여성의 자유를 부르짖는 이 무렵의
여권운동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다.

페미니즘에 찬물을 끼얹는 이 말은 ‘반페미니즘’이라는 낙인이 찍힐 만한 중대한 발언이다. 여성을 여전히 남성의 종속물로 간주하고 소비 사회의 상품으로 묶어 두려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편 『위대한 개츠비』에서 피츠제럴드는 性에 관해서는 급진주의적인 경향을 보여 주기도 한다. 양성애나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작중인물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몇몇 州에서 동성 결혼까지 허용하는 마당에 동성애는 그렇게 화제가 아닐지 모르지만 20세기 초엽에는 사정이 달랐다.

그런데 이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데이지의 친구요 프로 골프선수인 조던 베이커, 머틀 윌슨의 여동생 캐서린은 레즈비언이거나 양성애자일 가능성이 높다.
『냉혈』로 유명한 트루먼 커포티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개츠비로, 미아 패로가 데이지로 등장하는 영화의 각색을 맡으면서 닉을 남성 동성연애자로, 조던을 여성 동성연애자로 만들어 버렸다.
관객을 의식한 영화사는 결국 커포티를 해고했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서둘러 각색을 마쳐 영화를 촬영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껏 비평가들이 그토록 모범적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한 ‘성실남’ 닉 캐러웨이가 동성애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닉과 제이 개츠비의 관계에 의심을 품는 비평가들도 있다.

그들은 닉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성보다는 남성에 더 이끌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츠비와의 관계는 그만두고라도 이 소설의 제2장의 마지막 장면을 꼼꼼히 읽어보면 닉은 동성애적 성향을 지닌 인물임이 밝혀진다.
톰과 머틀의 아파트에서 술을 마신 닉은 새벽녘에 아래층에 살고 있는 사진작가의 아파트를 방문한다. 그런데 닉은 갑자기 “나는 그의 침대 옆에서 서 있었고, 그는 속옷 바람으로 두 손에 커다란 포트폴리오를 들고 시트 사이에 앉아 있었다”고 말한다. 피츠제럴드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 부호를 많이 사용하는 탓에 두 사람 사이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행간을 읽어보면 닉과 사진작가가 동성애를 벌였다고 미뤄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소설의 제국』은 副題 그대로 소설이라는 거울을 통해 바라본 아메리카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나는 이 책에서 미국이 그동안 어떻게 문학을 통해 세계를 재패하려고 애써 왔는지 보여주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미국은 그동안 세계의 맏형으로 군림해 왔다. “칼과 달러로써 세계를 지배했으니 이제는 문화로써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학가와 예술가 등 문화계 인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코카콜로니얼리제이션(코카콜라식민지화)’이니 ‘맥도널디제이션(맥도널드화)’니 하고 부른다. 청량음료수와 패스트푸드뿐만 아니라, 영화 『람보』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미국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이미 미국 소설가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미국 작가들은 처음부터 소설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 가치관, 이데올로기 등을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너새니얼 호손을 비롯해 마크 트웨인과 피츠제럴드를 거쳐 하퍼 리와 마여 앤젤루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미국 작가들은 하나같이 전 세계에 미국적 이미지를 널리 알림으로써 말하자면 ‘세계의 영혼’을 지배하려고 했다. 인류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성을 목숨처럼 생각해야 하는 지금 그러한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뿐이다.

 

김욱동 한국외국어대·영문학

필자는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 『은유와 환유』 등의 저서가 있다. 최근 펴낸 『소설의 제국』에서, 미국소설이 세계의 영혼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