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0:20 (금)
수입이론 탈피한 의욕적 접근 … 작품 해석의 새로움 제시했나
수입이론 탈피한 의욕적 접근 … 작품 해석의 새로움 제시했나
  • 조해옥 고려대·국문학
  • 승인 2008.10.06 11:4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신범순 지음│현암사│2007│528쪽

조해옥 고려대·국문학
신범순 교수의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는 기존의 이상 연구의 태도와 독법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이다. 그는 기존의 이상 연구는 시기마다
달라지는 수입 이론들에 이상 작품에 대한 해석과 의미가 종속돼 형성돼 왔다고 본다. 그는 이상을 이러한 식민지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때가 됐다고 진술하면서 비주체적인 이상 연구의 경향을 벗어나려는 태도를 적극적으로 취한다. 이러한 저자의 태도는 그가 평가하는 이상의 사상적 위대함에 대한 그의 확신과 신념에서 온다. 그는 이상의 사상은 “그에게 입혀온 서구적 사상의 옷들보다 훨씬 크고 정교하며, 그러한 서구이론이 제시하지 못한 진정한 근대초극의 방향을 제시(37~37쪽)”한다고 본다.

그는 이상이 일제의 종속적인 분위기에서도 멋진 사상을 꽃을 피워낸 사람이었지만, 누구도 이상의 위대한 고유성을 이해하지 못 했다는 지점에서 신범순 자신의 이상 연구의 출발과 의의를 암묵적으로 밝히고 있다. 신범순의 이상 연구는 외부 이론에 의해 좌우되는 비주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서 이상이 지닌 고유한 사상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려는 의욕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신범순은 이상의 고유사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어들을 많이 창조해 내는데, 그것은 악무한, 참무한, 감침기호, 수염나비, 초검선적 휴머니즘 등이다. 이들 용어를 사용해 그는 이상의 초기 시작품들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이상의 고유사상을 밝혀나간다. 신범순의 이상 읽기의 새로운 측면은 기존의 독법을 파괴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상 읽기는 학술의 영역과 대중적 지식의 경계를 깨뜨리고 자유롭게 이동한다.

기존의 작품 해석이 통합과 체계 속에서 이상 작품이 갖는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독법이라 한다면, 신범순의 독법은 철저히 기존 독법을 벗어나 있다. 그의 새로운 독법이 지향하는 목적은 이상의 작품 해석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있다. 신범순은 사유의 방대함과 다양한 시각으로 이상의 작품에 접근한다. 이상의 시와 소설과 수필과 서간 등 작품의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러나 그의 연상과 추측에서 의미의 단언과 규명으로 선회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신범순은 이상의 소설 「실화」와 정지용의 시 「말」과 김기림의 시 「쥬피타 추방」을 한 자리에서 읽어내는데, 그가 이상의 『실화』에 나오는 ‘다락 같은 말’과 이상이 개인적으로 좋아했다는 정지용의 시「말」과 이상을 추모하는 김기림의 시 「쥬피타 추방」을 연결 짓는 기호는 이상이라는 한 개인이다. 물론 신범순의 유동적인 작품 읽기의 목적은 이상의 작품 해석에 좀 더 풍부한 내용을 담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과정에서 실종된 것은 「실화」에 나타나는 이상의 문학의식이며, 새롭게 탄생한 것은 「실화」의 작가인 ‘이상의 개인적인 측면’에 대한 추론이다.

질서와 체계에 순응하는 작품 읽기를 거부하는 신범순의 새로운 독법은 이상이라는 기호를 손에 쥐고 김기림의 시 「쥬피타 추방」에서 보들레르의 시 「잃어버린 원광」으로 유동한다. 신범순은 「황」(이상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조연현의 발굴원고-필자 주)의 ‘죽음의 숲’에서 원시적인 숲의 인상을 읽고 부채 이미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부채 이미지는 김기림의 「쥬피타 추방」의 “거룩지 못한 원광”으로 연결되고 이는 보들레르의 시 「잃어버린 원광」에 나오는 원광의 의미로 이어진다. 보들레르의 「잃어버린 원광」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대도시 파리에 대한 비판이 이상의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인 「오감도 시제1호」, 「파첩」, 「가외가전」 등으로 이동한다. 신범순의 시선은 다시 정지용의 시 「말」과  마리 로랑생의 그림으로 이동하고 이어서 이상의 자화상으로 옮겨진다. 이러한 신범순의 거침없이 흐르던 사유의 물길이 지나간 후에 바닥에 결정처럼 남아 있는 것은 이상의 작품보다는 개인으로서의 이상에 대한 그의 이해이다.

신범순의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의 본론에 해당하는 것은 이상의 초기시편들에 대해 살핀 부분이다. 이상의 초기시편인 「선에 관한 각서 1」에서 신범순은 ‘초검선’ 이미지를 찾아낸다. 초검선은 “근대적인 한계를 모두 초월함으로써 근대적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논리와 사상을 폭발시킬 만한 강렬한 개념이다. 동시에 무한적 우주와 소통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적극적 긍정적 세계관이기도 하다(193쪽).”

초검선은 신범순의 조어인데, 그는 초검선을 설명하기 위해 잉카문명과 아즈텍문명, 우리나라의 금줄과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의 줄 등 세계의 민속학까지 섭렵한다. 그가 이상의 초기시를 해석하기 위해 고대문명과 우리의 고유문화와 연결 짓는 것은 이상의 사상적 고유성과 시원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다.

신범순은 이상의 고유 사상으로 ‘무한호텔’을 발견한다. 그는 근대적 현실이 무한정원 혹은 무한호텔적인 세계를 붕괴시키는데, 이상은 이러한 근대적 현실의 ‘껍질적인 본질’을 명백히 드러내고 이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한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신범순의 해석대로 이상의 작품에 나타난 의미를 근대적 현실에 갇힌 자의 탈출욕구로만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의 작품을 평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植民地人 이상은 식민지 도시에 갇힌 자로서만 존재하지 않았다. 1930년대 경성의 일상을 다루고 있는 이상의 「조춘점묘」와 「추등잡필」을 보면, 이상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시선으로 자본이 지배하는 도시 공간과 그곳을 배경으로 배태된 인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도시적 일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드러냄과 동시에 도시 예찬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도시비판의 시각만을 보여주는 그의 시에는 나타나지 않는 태도다. 그의 시에서는 도시의 부정적인 이면이 첨예하게 드러난다. 반면에 그의 수필에서 이상은 일상을 바라보는 다면적인 시선과 감정을 표출한다. 이상은 1930년대 경성을 수필에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수필에 나타나는 이상의 이중적 시선과 태도는 이상이 일상 속에서 실제로 체감한 근대 도시의 이중적 면모의 재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에 대한 무한한 찬미와 이상적인 의미부여가 근대 현실의 탈출의식과 이상 세계의 추구로 이상 작품의 본질적 성격을 무리하게 이끄는 것이다.

신범순이 애초에 선택한 독법으로, 이상의 시와 소설과 수필로 장르 구분 없이 넘나드는 방법의 맹점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상의 시와 소설과 수필에 담긴 의미는 각 장르마다 고유하다. 그런 까닭에 이상의 각장르에 대한 의미 해석이 엄밀하게 이루어진 다음에야 각 장르를 넘어서는 이상의 문학적 사상이 총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신범순은 이상의 미발표 유고로 추정되는 조연현 발굴원고인 「황」과 「황의 기」에 나오는 개인 ‘황’을 이상의 자화상의 지배적인 색채인 누런 색채와 연결 짓고 황은 이상의 필명인 하융-물 속의 오랑캐-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해석한다. 신범순의 이 같은 인식의 전개는 몽상적인데, 그보다도 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가 「황」과 「황의 기」을 비롯해 이상의 미발표유고로 추정되는 조연현 발굴원고에 대해 어떠한 의문이나 근거 없이 이상의 작품으로 수용하고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상 작품을 해석하는 근거로 조용만이나 서정주 등의 이상에 관련된 기억을 담은 글들에 의지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드러난다.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가 기존 연구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새로운 이상 연구의 국면을 맞이하기 위한 연구서로서의 위치를 갖고자 한다면, 그가 창안해낸 새로운 독법에 전제돼야 할 것은 논리의 타당성과 객관성의 유지이다. 아울러 이상 작품에 대한 연구인가 아니면 이상 작품들을 원용한 이상이라는 개인에 대한 읽기인지 저자 자신의 태도를 명료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

 

조해옥 고려대·국문학

필자는 고려대에서 이상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등의 저서가 있고,  「이상 수필에 나타난 이중성 연구」등의 논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청가인 2011-06-03 23:27:52
시제1호는 자아를 모르는 채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자아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시입니다.

육신이 죽으면 끝(막다른 골목)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아는 육신의 죽음 후에도 계속된다는 것(뚫린 골목)을 알려줍니다.

그는 또한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분류했는데,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들(무서운아해)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무서워하는아해)로 나누었습니다.

자아체득을 삶의 유일한 목표라 생각한 그에게 다른 분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뿐이'모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자아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미 생과 사의 구별이 큰 의미가 없으므로, 뚫린 골목이라고 해도 좋고, 질주하지 않아도 좋은 것입니다.

깨달은 그가 까마귀의 눈으로 육신의 현실만이 모든 것이라 여기며 사는 사람들을 굽어보면서 쓴 시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있는 것입니다...

고도의 지적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직 남보다 잘 먹고 사는 것일까요?
종족 유지에 기여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살다 죽는다면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그가 2,000여편의 시 중에서 23(30)편을 '땀을 흘리며' 오감도로 묶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을 추려 뽑느라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23편의 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주제가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 주제는 바로 자아입니다.
오감도 23편은 자아에 관한 이야기로 일맥상통합니다...

오감도의 해설이 일맥상통하는 주제가 없이 횡설수설한다면, 그 해석은 오감도를 제대로 해설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에코우> 오감도 해설서, 청가인 저, 도꼬마리출판사. 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