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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는 권력기구가 존재하지 않은 아나키적 사회”
“폴리스는 권력기구가 존재하지 않은 아나키적 사회”
  • 최자영 부산외대·서양고대사
  • 승인 2008.09.2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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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책을 말하다]『고대 그리스 법제사』(최자영 지음, 아카넷, 2007)

현재 우리나라 법과대학의 교과과정에는 ‘서양법제사’라는 교과목이 올라있으나, 이것은 로마법부터 시작한다. 로마법이 중세의 게르만법과 융화돼 근대법으로 발전하게 되고 대륙법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상식으로 돼 있다. 그런데 최초로 로마의 성문법이 만들어질 때 그리스 법을 모태로 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고대 그리스 법제는 로마의 법제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는 12표법을 만들 때 로마인은 그리스인이 사는 여러 나라들을 두루 다니면서 다양한 법제를 배웠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로마는 조그마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거대한 지중해제국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초기의 자생적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면들을 상실하게 된다. 오늘날 전하는 로마법은 대개 기원후 6세기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그 동안 남아있는 법들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고도의 정치조직과 군사력의 발달에 상응하는 것들이 잔존해 후세에 전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 법제의 성격은 그리스의 것에 비하면 더 단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법제는 로마의 세습화된 각종 특권 귀족이나 상대적으로 강했던 부권, 사적 재산권의 비중 대신 전반적으로 공동체성이 더 강했다. 그리고 폴리스 사회마다 공동체성과 사적 권리의 병합 비율이 같지 않았다. 하나의 제도나 가치관만이 진실이 아니라 어떤 제도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 인간의 소원과 실천에 달려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 그리스 법제의 세계이다. 바로 이 그리스 법제 세계의 흥미로움이 연구의 필요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 법제를 연구해야 해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권력의 문제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국가의 존재나 그 권력의 행사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권력의 주체가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점은 큰 의미를 지닌다. 시민단으로 구성된 폴리스는 시민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 흔히들 이런 그리스의 폴리스 정치체제는 규모가 작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있으나 그렇지 않다. 핵심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것이다. 시민단의 폴리스에서는 각자가 무기를 소지했으며, 권력이나 무력이 한 곳에 집중되거나 조직화돼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 비겨서 말한다면, 고대 폴리스는 권력과 무력이 외부로 넓게 확산돼 개인이 소지했으며, 국가의 조직적 군대나 권력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던 아나키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시민의 자유란 노예노동에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과 무력에서 자유로웠음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국가의 권력에 복속된 동방의 농민들을 ‘왕의 노예’로 불렀다. 그들이 조직적 권력과 무력의 기구를 구비한 국가에 소속된 우리를 본다면 ‘국가의 노예’로 칭했을 법하다.

독립된 많은 폴리스로 구성돼 있던 고대 그리스 사회는 그 법제의 성격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거나 일정한 발전의 방향을 설정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은 유기체가 진화의 소산인 것처럼 법제도도 역사 발전의 소산물로 규정하고 그 방향은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이행했던 것이라고 한 메인(H. Maine)의 『고대법』에 보이는 견해와 다른 것이다. 메인은 고대사회를 가부장적 신분제 사회로 규정했으나, 고대 그리스는 가부장권이 발달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메인이 연구대상으로 한 고대는 주로 로마사회였기 때문에 결함이 있다.

폴리스는, 동방의 군주제나 오늘날 근대국가 같이 다소간에 일률적으로 편제된 행정조직 같은 것이 아니라,원심적으로 사람들 개개인의 집합으로서 ‘아나키’적인 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폴리스는 각종 하위 공동체 집단을 중심으로 多核的이며 원심성이 강한 사회였다. 부족, 씨족, 가문 혹은 촌락공동체 등 폴리스의 하부조직은 다소간에 후대보다 공동체성이 더 강했고, 폴리스의 기능에 유사한 자체의 조직 및 기능을 갖췄으며, 폴리스와 상호 협조체제를 이룬다.

특히 사회신분과 관련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크게 잘못 이해되고 있어서 시정을 요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폴리스의 구성원이 시민과 노예로 나뉘어져 있고 시민은 노예의 노동력에 의존해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 또 남성은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여성은 시민권이 없어 거류외인이나 노예에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 등이다. 시민은 노예에 대조되는 개념이 아니다. 노예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시민의 개념은 성립한다. 시민의 개념은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지위만이 아니라 가문이나 씨족 등 혈연공동체 내의 권한 및 지위와도 연관이 있다. 전자는 남성이 중심이 되지만, 후자와 관련해서는 여성도 시민권자로 규정된다. 한편, 시대에따라서는 시민과 비시민의 구분 자체가 명확하지 못한 경우도 있는데, 솔론의 시대의 아테네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노예인가 자유인인가 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이 아니라 개인 간 사법적 관계에 의한다. 여기서 시민이 아닌 동시에 노예도 아닌 자유인이 존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더구나 그리스 사회의 ‘예속노동(doulos)’의 개념은 반드시 종신의 예속민이 아니라 일시적인 노동력 제공자까지를 포함하는 광범한 개념으로 쓰였다.고대 그리스 사회의 법제를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제반 제도에 대한 반성을 담보로 한다. 폴리스에서 시민이 향유했던 자유란 중세 봉건사회, 나아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위적 제반 제도로부터 억압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였음을 뜻한다.

 

최자영 부산외대·서양고대사

필자는 그리스 이와니나 대학에서 고대아테네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고대 아테네 정치제도사』, 『그리스 문화와 기독교』 등의 저서와 「고전기 아테네 여성의 시민권과 사회적 지위」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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