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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성·계산가능성이 논전 場...수학과 실험 앞세운 물리학 우위
불연속성·계산가능성이 논전 場...수학과 실험 앞세운 물리학 우위
  • 오주훈 기자
  • 승인 2008.09.16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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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간 대화로 읽는 학술키워드_5. 근본실재] ‘근본실재’를 둘러싼 쟁점

자연의 근본실재에 대한 물리학과 철학의 입장을 대비시켜 볼 때, 가장 큰 쟁점은 계산 가능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에 있다.
물리학은 근대 과학 혁명 이후 확립된 실험과 수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측정 가능하고 계산 가능한 데이터만을 인정해 왔다. 곧 자연의 근본실재를 양화 가능하고 분석적인 틀을 통해 바라보려 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분절되고 불연속적이며 그 자체로는 변하지 않는 단위들을 통해 실재를 기술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실재가 연속적인 질적 변화의 흐름이라면, 계산과 측정을 가능하게 할 양적인 분절적 단위들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은 엄밀한 수리적 법칙의 규정을 받는 불연속적 단위인 입자들을 자연의 근본실재라고 바라본다. 반면 철학, 특히 형이상학은, 모든 형이상학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측정과 계산의 지평을 넘어선 곳에서 실재를 사고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는 실재를 분석적 틀로 절단할 수 없는 변화와 생성의 연속적 흐름이라고 바라본 베르그송 등에 와서는 더욱 분명해진다. 베르그송과 같은 형이상학자들에게 물리학의 방법론은 근본실재가 지닌 창조적이고 질적인 풍요로움을 배제하기에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수학과 지성의 언어는 근본실재에 인위적 메스를 들이댄 셈이다.

형이상학보다 물리학에 더 많은 신뢰
우선 물리학의 입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 19세기 말 톰슨이 전자의 존재를, 20세기 초 러더포드가 α입자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핵의 존재를 발견한 이후, 물리학은 자연의 근본 실재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왔다. 숱한 입자들의 발견과 양자역학의 진보 그리고 여러 물리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 입자 물리학은 1979년 노벨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 압두스 살람, 셀던 글래쇼가 주도한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표준 모형은 자연계의 모든 물질이 기본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삼라만상이 구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변하지 않고, 각자가 불연속적으로 존재하며, 수리적 법칙으로 기술이 되며, 원칙적으로 측정 가능한 입자들이 모여서 자연을 구성하는 것이다. 입자 물리학에서는 와인버그 텍사스대 교수와 글래쇼 하버드대 교수가 세계적인 권위자이고, 우리에게도 유명한 고 이휘소 박사 역시 게이지 통일장 이론의 발전에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는 이론 분야에 김진의 서울대 교수, 실험 분야에서는 김영기 로체스터대 교수가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양성자·반양성자 충돌실험그룹(CDF)’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데,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형이상학의 경우를 보자. 형이상학 중 특히 생성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는 경향은 자연의 근본 실재를 입자들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들이 지적하는 입자 물리학의 난점은 자연이 양적으로 분할 가능하고 불연속적이며 계산 및 측정이 가능하다고 보는 물리학의 사고방식으로는 질적인 변화와 지속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들 형이상학자들은 변화와 지속이 결코 입자와 같이 불연속적이고 양화된 단위들의 결합을 통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 등은 실재가 근본적으로 연속적이며, 분할 불가능하며, 창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입자 물리학적 관점은 생물 등에서 볼 수 있는 실재의 발생적 성격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의 뒤를 이어 시몽동과 들뢰즈 등이 생성의 형이상학에 나름대로 기여를 했다. 주요 연구자로는 들뢰즈 연구로 유명한 컬럼비아대의 마뉴엘 데란다 교수와 영국 워릭대의 피어슨 교수가 있다. 국내에는 들뢰즈를 소개하고 있는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이 물리학과 다른 방식으로 실재를 바라보는 형이상학의 관점에 대해서 여러번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입장이 지닌 나름의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분석적으로 보려는 물리학은 수학과 실험이라는 도구를 통해 빼어난 성과들을 제출하면서, 자연의 근본실재에 대한 지식의 전도자로서 광범위한 신뢰를 얻고 있다. 검증이 불가능하고 학자들마다 다른 개념과 직관에 근거한 형이상학의 입장은, 일부 철학계의 경우를 제외하면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못한 형편이다. 더구나 철학 내부에서도 과학이 아닌 사변만으로 실재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비판이 이미 20세기 초부터 제기된 바 있어, 이래저래 형이상학의 지위는 불리한 형국이다.

오주훈 기자 apor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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