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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콩트] 화성 혹은 열린사회를 향한 김교수의 명상
[신년기획콩트] 화성 혹은 열린사회를 향한 김교수의 명상
  • 교수신문
  • 승인 2002.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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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馬들의 군무속에 들려온 환청…바른 학인의 길 다짐
무엇인가가 다시한번
그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작고 튼튼한 흰 말의 갈기같기도 했고,
어쩌면 뒷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쿠 하면서 김교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 했다.

지리멸렬한 전쟁의 막바지에 태어난 김교수가 ‘화성’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2백년 먼저 태어났던 正祖가 자기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축조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사연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딱히 말한다면 김교수는 정조의 화성 축조를 “政爭의 한가운데서도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해석하는 걸 선택해왔다. ‘신도시 건설’이라는 그 야심에 찬 슬로건이 그를 매료시켰던 것이다. 부모를 받드는 효를 명분으로 ‘새로운 도시’의 필요성이라는 당시 사회경제사적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밝은 위정자의 모습에 학자 군주의 모습이 겹쳐진 탓일까.

간밤에 꾼 꿈이 김교수를 아침나절부터 비몽사몽의 상태로 몰아갔다. 무수한 백마들의 군무 속에서 한껏 기품있게 솟구친 성곽이 푸른 햇살 속에서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데, 손을 내밀면 곧 잡힐 듯 하면서도, 좀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안타까움을 부채질했다. 올 해에는 꼭 화성에 가야지, 암, 가구말구. 김교수는 새벽 꿈 속의 성곽이 틀림없이 화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올 해의 일년 스케줄을 꿰기 시작했다.

신학기부터는 사회과학대학장직을 맡아 훨씬 더 분주해 질 것이고, 조만간 있을 학회 선거에서 자기 세대를 대변하는 이교수를 도와 학회를 새롭게 출범시켜야 할 막중한 과제를 짊어졌으며, 박사과정 제자들의 학위논문 마무리를 돕는 한편, 어디 지방에라도 강의자리를 마련해주려면 부지런히 눈도장을 찍어둬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오십줄에 접어들면서 몸도 마음도 한풀 꺾여가는 자신을, 늦은밤 화장실을 나오면서 드문 오줌발 끝에 남는 아쉬운 尿氣처럼 발견하고 있는 그였기 때문이다. 혼돈에 가까운 대선 정국에서 처신도 중요하다. 자신만은 이 시대의 진정한 학인으로 남을 거라는 소리가 내면에서 메아리처럼 계속 울려왔다.
명상에 잠긴 그를 깨운 건 ㅈ일보 정치부 부장으로 있는 고향 후배였다.

“형님, 글 하나 쓰시죠. ‘대선정국, 이 후보를 말한다’ 적격자가 형님 아니겠습니까?” 수화기 너머 살집 좋은 정부장의 얼굴이 솟구쳤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런 거 안써. 아니 못써! 왜 벌써부터 이 난리들이야? 다른 거 없어?” “아니 무슨 말씀, 지난 대선에도 멋진 글로 급소를 쳤잖습니까? 우리도 알 건 다 압니다. 왜, 후보가 맘에 안 드세요? 우리 보기엔 이 양반이 딱 적격인데…”, “됐네 이 사람아. 맘에 안들고 들고가 어디 있어. 자네들 시각이 너무 협량해. 다른 사람 알아봐요.” 저편에서 언성이 불그락푸르락 높아지는 게 눈에 선하지만, 김교수는 서둘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화성에 대한 자신의 명상이 분산된게 이만저만 불쾌하지 않아서였다. 그렇지만 그의 명상은 이내 깨어졌다. 두 번째 전화벨이 그의 고막을 압박했다.

이번엔 출판사였다. 지난해부터 발표했던 논문을 모아 단행본 작업을 해왔지만, 신년의 들뜬 분위기에 잠시 생각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선생님, 내일까지 교정쇄를 보내주셔야 하는데요. 그래도 1교를 정확하게 봐 주셔야 저희가 나머지 작업을…”, “알았어요. 내 곧 해드리리다.” “그런데 선생님, 틀림없이 2백부는 가져가시겠죠? 요즘 학술서들이 워낙 고전해서 말입니다.” 난처했다. 이 출판사 사장은 항상 이런 식이다. 학술서는 잘 팔리지 않는다, 선생님이니까 출판해드리는 겁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얼르고 후려치는데 이골이 난 사람 아닌가. 얕은 한숨이 스며 나왔다.

김교수의 명상은 이제 제법 고요한 가운데로 침잠하는 듯 했다. 집안의 고요를 오랜만에 누려보면서 그는 자신이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불현듯 김교수는 자신의 발 아래가 허전한 것을 느끼면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는 서둘러 핸드폰을 때리고 있었다. “거기 ㅈ일보 정부장이죠? 아, 납니다. 아까 그 청탁 내가 맡죠 까짓거. 아까 정형이 말하던 이후보가 새나라 만들기에 나선 그 사람 맞죠? 나랑 생각이 비슷한 양반이더군요. 언제까지 보내면 돼죠?” 김교수는 이어 홍군을 급히 호출했다. “홍군, 교정 아직 안 끝났는가? 내일은 출판사로 넘겨야 해. 잊지말도록. 그리고 박사장한테 3백부까지 가져가겠다고 말해두도록.”

명색이 학장인데 저서 다섯 권은 돼야 남들 앞에 위신이 서겠지……후배 교수들 업적평가를 하려면 그래야겠지. 김교수는 대선 정국에서 자신이 어떤 카드를 활용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同鄕의 이후보가 대권을 장악한다면, 어쩌면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나보다 못한 치들도 거들먹거리며 대접받았는데, 난 뭔가. 학자적 양식? 잘 모르겠다.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화성에 가는 건 내일이라도 늦지 않다. 아니, 어쩌면 화성 따위는 지도위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일지도 모른다. 내가 안주할 ‘새로운 도시’를 찾아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 지금 나라 안의 사람들 모두가 새로운 도시를 열망하고 있지 않은가.
김교수는 마음이 더 바빠졌다. 또다시 나타난 무수한 백마들이 떼지어 자기를 에워싸고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말들은 자기를 관통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곳이 아마 화성쯤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가 다시한번 그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작고 튼튼한 흰 말의 갈기같기도 했고, 어쩌면 뒷발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쿠 하면서 김교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 했다.

“선생님, 저 홍군입니다. 교정지 주신다면서요? 이번 책은 정말 기대됩니다. ‘열린 사회를 찾아서’라는 제목 너무 좋습니다. 새해 인사겸해서 동료들과 함께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가르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홍군의 전화였다. 김교수는 간신히 목소리를 뱉어냈다. “자네… 화 …화성을 아는가?” 김교수의 목소리는 너무나 깊고 깊은 곳에서 떨리듯 울려나왔기 때문에 그 목소리가 홍군에게까지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부신 햇살이 김교수의 얼굴위로 바짝, 아주 바짝 가득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허영수 기자 ysheo@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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