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는 초대형 국제대회 두 가지가 연이어 열렸다. 지난 주 고려대에서 세계언어학자대회가 열렸고, 연이어 서울대에서 세계철학대회가 열리고 있다.
세계언어학자대회 주제는 ‘인간언어의 통일성과 다양성’이었다. 대회 주최 측은 “세계어로 자리 잡은 영어의 포식성이 날로 언어생태계를 잠식해가고 있는 오늘날, 언어의 다양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이라면서 “소수언어 보호와 언어다양성 제고를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이번 대회는 이들 소수언어에 대한 생태적 보호를 주제로 삼았다”고 밝혔었다.
대회가 열린 고려대에는 그러나, ‘포식성’을 띤 영어 일색이었다. ‘소수언어’인 우리말은 대회 자원봉사 학생들 간 잡담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기조연설회장에서 사회를 맡은 한국인 교수는 유창한 영어로 연사를 소개했다. 독일인 연사 역시 영어로 강연을 이어갔다. 객석에 있던 참가자들이 연사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때, 영어능력이 미천한 기자는 다른 참가자들이 웃을 때 웃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다. 유머도 ‘히어링’ 못한 열등감을 지고 조용히 강당을 빠져나왔다.
세계철학대회 조직위원회는 “지금까지 세계철학대회는 서양 문화권에서만 개최돼 대회 성격도 ‘서양철학대회’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대회는 동서양을 아우르고, 남미와 아프리카 철학자들도 참여하는 ‘세계’철학대회라는 위상을 재정립하게 됐다”며 대회 의의를 밝혔다. 서양철학(philosophy)만이 아니라 동양의 ‘哲學’, 제3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고유한 철학을 함께 아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고유한 철학들도 모두 영어로 설명됐다.
세계철학대회 개막일 기자회견장에는 동시통역사가 참석자들의 말을 한영, 영한으로 통역해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국인 기자들은 죄다 ‘네이티브’ 같았다. 너무나도 유창한 영어로 질문을 하자 ‘우리끼리는 영어로만 대화해도 통하잖아’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시간관계상 불필요한 우리말 통역은 생략됐다. 영어능력이 미천한 기자는 또 한 번 주변인이 됐다. 그런 주변인은 또 있었다. 한 차례 우리말 답변 이후 영어통역이 생략되자, 우리말 능력이 미천한 외국인 기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Transla…”이라고 외쳤다. 기자도 “통역 좀…”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짐짓 영어를 알아듣는 척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영어능력이 미천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혹시 7개 국어를 하면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나, 영어능력'만' 미천한 위대한 학자도 있을 수 있다. 소수언어를 살리려면 소수언어를 널리 써야 한다. 영어가 소수언어들을 대신하면서 소수언어의 쓸모가 없어진 것이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영미철학을 하는 사람이 고급 영어를 익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한국철학을 이해하려면 외국 학자들이 한국어를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