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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얻어맞다
영어에 얻어맞다
  • 박상주 기자
  • 승인 2008.07.31 11:45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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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세계언어학자대회, 세계철학대회

최근 한국에서는 초대형 국제대회 두 가지가 연이어 열렸다. 지난 주 고려대에서 세계언어학자대회가 열렸고, 연이어 서울대에서 세계철학대회가 열리고 있다.

세계언어학자대회 주제는 ‘인간언어의 통일성과 다양성’이었다. 대회 주최 측은 “세계어로 자리 잡은 영어의 포식성이 날로 언어생태계를 잠식해가고 있는 오늘날, 언어의 다양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이라면서 “소수언어 보호와 언어다양성 제고를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이번 대회는 이들 소수언어에 대한 생태적 보호를 주제로 삼았다”고 밝혔었다.

대회가 열린 고려대에는 그러나, ‘포식성’을 띤 영어 일색이었다. ‘소수언어’인 우리말은 대회 자원봉사 학생들 간 잡담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기조연설회장에서 사회를 맡은 한국인 교수는 유창한 영어로 연사를 소개했다. 독일인 연사 역시 영어로 강연을 이어갔다. 객석에 있던 참가자들이 연사의 말에 호응하며 고개를 끄덕거릴 때, 영어능력이 미천한 기자는 다른 참가자들이 웃을 때 웃는 이유를 몰라 당황했다. 유머도 ‘히어링’ 못한 열등감을 지고 조용히 강당을 빠져나왔다.

세계철학대회 조직위원회는 “지금까지 세계철학대회는 서양 문화권에서만 개최돼 대회 성격도 ‘서양철학대회’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대회는 동서양을 아우르고, 남미와 아프리카 철학자들도 참여하는 ‘세계’철학대회라는 위상을 재정립하게 됐다”며 대회 의의를 밝혔다. 서양철학(philosophy)만이 아니라 동양의 ‘哲學’, 제3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고유한 철학을 함께 아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고유한 철학들도 모두 영어로 설명됐다.

세계철학대회 개막일 기자회견장에는 동시통역사가 참석자들의 말을 한영, 영한으로 통역해줬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국인 기자들은 죄다 ‘네이티브’ 같았다. 너무나도 유창한 영어로 질문을 하자 ‘우리끼리는 영어로만 대화해도 통하잖아’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시간관계상 불필요한 우리말 통역은 생략됐다. 영어능력이 미천한 기자는 또 한 번 주변인이 됐다. 그런 주변인은 또 있었다. 한 차례 우리말 답변 이후 영어통역이 생략되자, 우리말 능력이 미천한 외국인 기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Transla…”이라고 외쳤다. 기자도 “통역 좀…”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짐짓 영어를 알아듣는 척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나라에서 영어능력이 미천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혹시 7개 국어를 하면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나, 영어능력'만' 미천한 위대한 학자도 있을 수 있다. 소수언어를 살리려면 소수언어를 널리 써야 한다. 영어가 소수언어들을 대신하면서 소수언어의 쓸모가 없어진 것이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영미철학을 하는 사람이 고급 영어를 익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한국철학을 이해하려면 외국 학자들이 한국어를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박상주 기자 sjpark@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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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2008-08-30 11:15:00
이 기사가 기자 본인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글로 보이십니까?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요. 아마도 댁은 세계화의 열렬한 신봉자이신 듯한데, 내가 보기엔 팍스 로마나의 열렬한 지지자인 것 같습니다. '관악'이라는 이름을 들이미신 것으로 보아 세계철학대회 열린 서울대 출신이거나 서울대에 기거하는 사람으로 추측되는데, 댁의 학교에서 열린 세계철학대회 욕했다고 불쾌했소? 거기 모인 학자들이나 영어로 얘기 나누면서 화기애애한 척했지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 참가자들은 학문에 대한 열정보다는 영어에 대한 절망만 한아름 안고 돌아왔을 거요. 심지어 발표하고 떠든 한국인 학자들마저도 영어로 발표한다는 자체로 인해 엄청난 스트레스 받았던 게 엄연한 현실이고. 영어가 권력이오? 댁의 주장은 영어가 권력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게 없소. 서울대 나온 사람들 중엔 왜 그리도 권력욕에 쩔어 있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소. 골수 친일파 자손이 총장이 되질 않나... 남의 학교, 남의 병원 역사도 다 자기들 거라고 우겨대질 않나... 일본 식민 권력 미화하는 데 여념이 없질 않나... 뉴라이트의 사상적 본산이질 않나... 제3자인 내가 봐도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가는 일들을 서슴없이 벌이고 있는 서울대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실제로 제국이나 됐으면 모르겠는데 제국'주의'에 목숨 거는 소인배들만 잔뜩 모여 있는 집단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오.

안암 2008-08-08 18:53:13
철학쪽 의견만 있는 것 같아서 적습니다. 큰 대회가 있다길래 가보았는데 기자님 말씀대로 영어일색인 점은 동의합니다. 이와 같이 다소 이상한 상황은 사라져가는 목소리를 쓴 수전 로메인 교수의 인터뷰였습니다. 영어에 '환장'하는 한국기자들이 이상하게 질문해서 쓴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메인 교수가 어릴적부터 영어몰입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주로 강조했더군요. 해방이후 영어교육에 중점을 둔 한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빈곤한 인식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과연 로메인 교수가 한국 상황을 조금이라도 파악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더군요. 그러면서 소수언어 운운이라니요. 이미 영어가 패권을 쥐고 있는 점은 인정하지만, 한국 학술을 한국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세계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한국이 장소나 돈만 대주는 일은 아닐텐데요. 최소한 국내 학자들을 참여시키기 위해서라도 한국어와 영어 정도의 두 가지 언어를 써야하고, 한국 학문에 세계인들이 관심을 가지려면 외국 학자들이 자신의 전공분야 한국어는 조금 익혀서 와야 한다고 봅니다.
'관악'께서는 박상주 기자님의 게으름을 탓하시는데요. 언어학쪽에 기틀을 잡으신 한 노 학자분도 발표를 알아듣지 못해 역정을 내시기도 했습니다. 그 분은 평생을 언어학 연구를 하셨는데 한국에서 세계대회를 열어 흥분한 마음으로 참석하신 분입니다. 그 분도 게으른 건 아니겠지요.
학술은 보편적인게 아닙니다. 특수하지요. 이번 대회에서 한국 학술의 특수성마저 보편 언어에 파뭍는 건 씁쓸한 경험이었습니다. 한국 학술이 대회만 유치했다고 큰 성과를 낸 것처럼 떠벌리는 유치한 수준은 넘지 않았습니까?

배원정 기자 2008-08-08 09:17:43
기사의견을 써주신 '참가자'님께서는 교수신문 배원정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메일에 참가자님의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wjbae@kyosu.net

참가자 2008-08-07 14:10:59
3. 철학이 워낙에 소통을 중요시하니까 비판이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저는 글쎄요... 싶습니다. 제 주위의 비전임 선생님들이 다른 학교 행사인데.. 그런 거 뭐하러 하냐며 냉소적 시각으로 거의 참여를 안하시던데 대회를 경험하고 나니 많이 아쉽더군요. 소통이란게 몸으로 부딪혀 만나는 거 만큼 확실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사교행사-논문발표-이래저래 오가며 만나기 등등을 통해 제가 사귄 해외분만 수십분이고 제 발표가 끝난 후에 서로 연구물 보내달라고 이메일 받은 분만 10여분이 넘습니다. 동구권, 북미,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분들이구요. 전 대회참가의 최대 성과가 바로 이런 분들과의 인적 교류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논문으로만 접했던 학자들 발표를 직접 듣는 것은 소통 문제로? 기대보다는 별로였으나, 발표 외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했습니다. 원래 학회란게 학술 목적 외 이런 교류가 중요한게 아니던가요?

저 영어 잘 못합니다(독,프어는 그나마 읽기만..). 발표문 그냥 읽었구요, 질문/답변, 개인적 대화도 다행히 전공 분야라 그럭저럭 단어 위주로 몸짓발짓으로 소통했습니다. 일본분들은 저보다 더 딱한 분들 있더군요. 그래도 전공 이야기하면 다들 진지하게 들어주고 떠듬이지만 또박또박 소통이 되더군요. 그냥 반갑게 인사하고 전공이 뭐냐, 주 연구가 뭐냐, 발표 뭐했냐.. 이런 두 세개 질문이면 충분히 깊이 있는 이야기가 가능했습니다. 이렇게 몸으로 부딪히지 않고서 소통의 부재를 말하면 약간 공허하게 들립니다.

4. 마지막으로 한국이 전세계 학문공동체에 노출된 것도 성과가 아닐까 싶네요. 외국인들의 네트웍을 한번에 뚫고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자꾸 이런 기회들이 생겨야 합니다.

참가자 2008-08-07 13:41:59
세계철학대회 비전임 참가자입니다.

1. 한국철학을 알리는 다양한 세션들이 있었습니다. 대회 간판격 주요 세션들에도 전통철학을 알리는 세션들이 있었구요, 일반세션에도 한국의 전통철학, 현대 사상에 대한 세션들이 있었습니다. 몇 개는 참가자 수와 그 열기만으로 볼 때 대단했습니다.

2. 전 비전임이라 10 만원 참가비 냈습니다. 가방에 두꺼운 책들까지 이것만 해도 5만원은 빠지겠더군요. 일반/전임은 할인가 15 만원으로 계속받았구요. 해외 학회에 나가는 경비를 생각하면 경제성 면에서 절호의 기회입니다. 해외 학자들은 국내분들보다 참가비도 더 내고 비행기표에 숙박까지 다 해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