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대로 보자
영화, 제대로 보자
  • 교수신문
  • 승인 2008.07.2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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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영화평론가

2000년대 한국 대중영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자기이미지, 혹은 죽음


오늘의 한국 대중영화 특히 성공한 대중영화들 가운데 다수에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외국의 성공한 대중영화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이 특징은 형식에서보다는 그 이야기와 정서에서 보다 두드러진다. 이 때문에 미학적 성취에 몰두하는 영화학자와 영화평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 물론 다른 분야의 학자와 평론가들이 한국의 대중영화 전반에 관심을 갖기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영화가 1990년대 중반 이후로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대중서사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특징들은 오늘의 한국사회 혹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이 특징들을 특정한 이론적 기반 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아니며, 그것의 사회문화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아니다. 다만 그 특징들이 반복되고 변주되는 현상 자체에 주목해 그 현상을 하나의 연구 주제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또한 성공한 대중영화들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특징을 제시하는 것으로 오인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어떤 종류의 영화들이 지속적인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면 거기엔 당대의 대중적 욕망과 무의식이 혹은 한국인의 집단적인 자기 이미지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쉬리>(1999) 이후에 굳어진 용어인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을 대상으로 한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기를 바란다.

1. 자살하는 소년들
일반적으로 성공적인 장르영화, 특히 액션영화는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 대중들의 불안을 달래고 대리 만족을 제공한다고 가정돼 왔다. 언어학자 로빈 라코프의 말의 빌리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창과 칼을 들고 들판에 나가 우리를 위해 싸워줄 아빠, 왕, 신, 영웅, 챔피언을 원하고 있다.” 장르영화는 자신의 주인공을 이런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대중들의 잠재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영화사를 통틀어 이런 대중적 요구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응답한 장르가 할리우드의 서부극일 것이다. 재즈와 함께 미국이 발명한 예술로 일컬어지는 서부극은, 영화사 초기에 탄생한 이래 남성적 장르의 모태가 되었으며, 전세계적으로 전파되며 갖가지 형태의 장르 변용을 낳는 데 기여했다.(예컨대 한국에는 대륙활극 혹은 만주 웨스턴이라는 불리는 장르가 1960년대에 꽤 유행했고, 올해 개봉될 김지운의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는 그 장르의 관습을 자의식적으로 전용하고 있다) 변용의 형태에 관계 없이 그 중심에는 대개 영웅담의 요소가 들어있다. 어떤 문화권이든 흥행작들 중에서 이런 영웅담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반지의 제왕>에선 모든 종족 가운데 가장 왜소한 호빗족의 남루한 소년이 지상의 안녕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영웅의 역할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 완수한다. 초역사적 상상력에 의해 변주되긴 했지만 고전적 영웅서사의 패턴을 채용하고 있는 셈이다. <매트릭스> 시리즈의 네오, <스파이더 맨>의 거미 인간, <엑스 맨>의 선한 돌연변이들 역시 인간 공동체를 위해 싸우는 영웅들이다. <트랜스포머>의 소년들과 착한 트랜스포머들은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다. <춤추는 대수사선>의 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왕자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유럽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킨 타이 액션영화 <옹박>도 부락의 위기 극복을 위해 도시로 나선 청년의 무용담이다. 인도의 마살라 장르의 주인공 역시 대개 공동체 영웅들이다. 장르의 고전기가 끝난 지 오래지만 각국의 많은 대중영화들은 여전히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영웅들에게서 대중적 교감의 통로를 찾고 있다.
시선을 한국영화에로 돌리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성공한 한국의 장르 영화에서 공동체 영웅은 오히려 희귀한 존재다. 2000년대 최고의 흥행작 4편인 <친구><공동경비구역 JSA><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만 놓고 봐도 이 점은 분명하다. 주인공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지닌 결함과 균열 때문에 고통스런 상황에 직면하지만, 공동체의 문제 자체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실미도>에서처럼 주인공이 국가 권력과 정면충돌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목적은 공동체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를 승인받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는 공동체의 문제엔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으며, 사랑하는 동생이 살해됐다고 판단하자 적의 편에 가담한다.
드문 예외가 <쉬리>다. 주인공의 직업부터 국가정보기관 요원이며, 그는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 지도 모를 테러를 영웅적으로 막아낸다. <쉬리>가 국내에서 성공한 한국영화 가운데 해외에서 비할 바 없이 좋은 흥행성적을 올린 사실은 이 영화의 영웅서사가 지닌 보편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 적은 영화들만큼의 흥행성적을 올리진 못했지만 <공공의 적>도 이런 예외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흥미로운 건 전작에서 다분히 고전적인 영웅을 채용했던 <쉬리>의 강제규 감독, <공공의 적>의 강우석 감독이 전혀 다른 유형의 주인공을 내세운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로 기록적인 흥행성적을 올렸다는 점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남성 영웅이 아니라, 홀로 남겨진 소년의 비애에 몰두한 한국영화들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둬왔다는 점은 분명하다.(여기서 소년은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의 소년이다) 물론 이것이 한국 장르영화들의 미성숙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지만 주인공의 성숙도와 영화의 질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고전기 장르의 진화 패턴을 보면, 공동체에 무심하거나 사악한 공동체와 단절한 채 단독자의 길을 걷는 주인공은 대개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한다.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두 전설적인 무법자의 도피 여정을 그린 <내일을 향해 쏴라>(1969)는 고전기 영웅 존 웨인이 스크린에서 거의 사라진 뒤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웅은 언제나 되돌아왔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 목록의 다수는 영웅담이 채워왔다. 한국영화에선 그렇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가련한 소년에게 이만큼 열렬하고 광범한 대중적 갈채를 보내는 곳은 아마도 한국 외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련한 소년이 한국인의 자기이미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영화적 영웅을 탄생시키는 토대인 ‘위기의 공동체’의 자리에 한국영화의 소년들에겐 ‘사악한 세계’가 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소년이 속한 공동체는 나쁜 세계 자체다. 그 세계는 전쟁이란 참화를 예고 없이 들이밀거나(<태극기 휘날리며>), 가난을 세습화하거나(<친구>), 이데올로기의 이름 혹은 국가적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인간적 연대를 파괴한다(<공동경비구역 JSA><실미도>). 그의 아버지는 나쁜 공동체의 희생자이거나 무기력한 메신저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법을 집행해야 할 생물학적 아버지는 처음부터 없거나 그런 능력을 상실했고, 소년은 맨몸으로 나쁜 세계에 내던져진다. 소년은 어떻게 남자가 되는가.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든가 아니면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다 성공하지 못한다. 공동체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혹은 소년은 공동체에 편입되는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고), 아버지 되기는 회피되거나 지연된다.
소년이 나쁜 세계가 매개 없이 대면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그에겐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 받을 수 있는 준거집단(인류, 국가, 민족, 마을 공동체 등)이 없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가족이 있을 수 있으나 그 가족은 이상하게도 처음부터 부서져 있거나 알아보기 힘들만큼 형체가 희미하다. <친구>의 주인공들에겐 무기력하거나 패배한 아버지는 있지만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공동경비구역 JSA>나 <실미도>에선 아예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관심을 가장 많이 가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조차 진태의 가족은 아버지는 부재하고 어머니는 말하지 못한다.
나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은 이제 자신이 속할 수 있는 유사 가족을 찾아 나선다. 이것이 같은 처지의 소년들과의 강렬한 연대로 나타나며, 많은 한국영화들은 소년들의 형제애의 추구와 실패를 이야기의 줄기로 삼는다. 형제애의 비극적 실패야말로 이 영화들이 가진 정서적 호소력이 핵이며 관객 1천만 시대를 가능케 한 무기다. 메가 히트를 기록한 많은 한국영화들이 남성 멜로드라마 혹은 남성 신파의 외양을 띠게 되는 경위다.
<친구>에서 이상한 점은 주인공들 스스로 정의한 오래 두고 가까이 사귄 벗이라는 정의에 들어맞는 친구는 하나도 없는데도, 특히 상택과 준석은 서로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변함없이 보존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그 둘의 우정이 빚어내는 정서적 힘은 굉장하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형제라는 점을 감안해도 진태의 진석에 대한 태도는 우애를 넘어 거의 동성애처럼 보일만큼 강렬하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네 병사의 우정과 <실미도>의 북파요원들 사이에 형성되는 동지애 역시 목숨을 걸만큼 절대적인 가치이며, 공동체의 가치는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이들을 홀로 내동댕이쳤으며, 형제애라는 마지막 구원마저 파괴하는 것은 공동체의 질서 혹은 세계의 숙명이다. 소년에게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사탄이며 역사적 시간은 악몽이다.
그런데 그 실패가 소년들이 자살(혹은 유사 자살)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실미도>의 주인공들은 말 그대로 자살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자살의 이유는 죄책감이지만, 그 죄책감은 타락한 세상의 질서로 인해 유사 형제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므로 그 자살은 반인륜적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질서를 향한 규탄이기도 하다. <실미도>의 자살은 직접적으로 국가기관의 비인간적 작동을 겨냥한다. 그 작동의 중단이 불가능할 때 자살 밖에는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친구>의 준석은 친구인 동수 살해를 지시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망가뜨려가다가 체포의 길을 자초하고 결국 가능한 석방의 문을 스스로 닫은 채 영원한 구금/자살의 길을 택한다.(준석이 면회를 마치고 감방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마치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는 동생 진석을 살리기 위해 사실상 죽음의 길을 택한다. 동생이 죽었다고 오인하자 그는 미쳐서 적군에 투항한 뒤 사신의 전사가 되고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모든 자살 혹은 유사 자살이 지독한 자기연민을 경유해 형제애 혹은 의리라는 소년/남성공동체의 신화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 변주들
1)웰컴 투 동막골(2005)
6.25전쟁 중 산중에서 길을 잘못 접어든 남한군 2명과, 북한군 2명은 평화로운 산간마을 동막골에서 만난다. 양자는 처음엔 서로 총을 겨누다가 점차 친구가 되어간다. 이 영화는 얼핏 보기에 전형적인 영웅서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연합군 폭격기의 공습이라는 동막골의 위기에 직면해 남북한 병사들이 합심해 마을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엔 간과하기 힘든 이상한 요소들이 있다.
동막골이 일종의 판타지로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란과 기근의 와중에 그토록 풍요롭고 평화로운 마을이 있었을 리 없으므로, 영화의 서사는 그 마을을 당대의 질서 밖에서, 혹은 세상 밖에서 그것과 절연한 상태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리고 있다. 그와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강원도 사투리(남과 북의 억양이 뒤섞인)를 쓰고 한복을 입고 농사를 짓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민족 공동체의 표상으로 그려낸다.(이 설정은 부분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와도 공유하고 있다. 전쟁이 터지기 전날 밤, 진태의 가족이 시냇가에서 노는 아름다운 장면은 그토록 불행한 현실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은 어떤 결핍도 없이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적 유토피아와 민족적 시원을 동일화함으로써 이 영화는 무대 설정에서부터 지극히 순진한 민족적 나르시시즘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순진성은 위험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연합군이 이 마을을 공습하기 시작했을 때, 이 전쟁은 곧바로 순수한 한민족과 사악한 외세(즉 선한 우리와 나쁜 그들)의 대립으로 성격 지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오인뿐만 아니라, 배타적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정당화가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남북한 병사가 연합군의 오인사격 유도에 성공하고 나서도 자신들이 살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동막골 보호 계획 속에는 자신들의 생존은 처음부터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계획은 온전히 자신들의 아름다운 자살이었다. 강냉이 튀김처럼 혹은 축원의 불꽃처럼 하늘을 수놓은 폭탄을 바라보며 그들은 지금 자신의 집단적 자살의 화려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판타지의 공동체를 위해, 그리고 세상의 질서를 초월한 자신들의 우정을 위해. 방점은 후자이며, 그들의 자살은 그들의 영웅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년적 자기연민의 연장이다. 자살의 행렬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2)왕의 남자(2006)
동료 남자를 사랑한 광대의 이야기 <왕의 남자>는 그 안에 담긴 성 정치학과 세속 정치학의 담론들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형태의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이 영화는 연인을 향한,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불타는 사랑이라는 매우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영화들과는 달리 여기엔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소년의 자기연민이 없다. 광대 장생 역시 자살하지만 그의 자살은 세상이 초래한 것이 아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와 맞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자신을 사실상 배신한 연인을 잃고 살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다.
이 영화는 한국 대중영화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주인공 장생이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그가 세상을 비웃을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이 지닌 광대로서의 능력이다. “입 맞춰 광대 짓을 하고 있을 땐 왕이 부럽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이 영화의 서사상의 결함은 오히려 그의 능력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선 확실히 앞선 영화들의 가련한 소년의 자리에 유능한 전문가가 와 있다. (이런 주인공의 성격 변화는 이후에 <타짜> <식객>을 비롯한, 주로 허영만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전문가 영화로 이어진다. 이것은 한국 대중영화의 새로운 축을 형성해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선 그 전문가 영화의 축은 다루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매우 신파성에도 불구하고 병적인 자기 연민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 앞선 영화들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건강하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사랑은 실패하고, 그의 자살은 줄 위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형상으로 미화된다. 자살의 행렬은 멈추고 않고 자살의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3)디 워, 화려한 휴가(2007)
<디 워>는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영웅담이다. 게다가 이 영웅은 국적과 시대를 초월한 적과 싸우는 인물이다. 할리우드 SF/재난장르의 가장 보편적인 영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놀라울만큼 앞선 영화들과 연속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심형래가 충무로 밖에 작업해온 감독이라는 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찬사를 보낸 관객들도 정서적으로 동화되기보다는 그것의 기술적 성취에 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에서 영화 외적 요소에 매혹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기술적 성취를 영화 내부에서 은밀하게 민족적 담론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며(우리의 기술로 할리우드를 이길 수 있다는 에필로그 혹은 이무기가 미국 대도시를 쑥밭으로 만드는 설정) 관객의 수용방식 또한 정확히 그에 조응한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를 민족공동체 영웅의 서사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족 영웅이 영화에 등장하자 곧바로 국경을 초월해버렸다는 사실에서 공동체 영웅의 형상화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화려한 휴가>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음에도 거의 모든 면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와 거의 같은 플롯을 채택하고 있다. 순수한 우리와 사악한 그들의 대립은 온존하고, 유사가족으로서의 ‘우리’의 죽음 혹은 자살이 ‘우리’의 순수성을 더욱 고양시킨다는 이야기 전개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텍스트 안에서의 해석과 무관하게, 그러한 실재 역사적 사건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상기시킨다. 어쩌면 한국 대중영화에서 의 긴 자살의 행렬은 바로 이 사건의 집단적 트라우마와 연관돼 있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여주인공이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 이 영화가 그 기억의 대단원을 장식하면서, 어쩌면 이제 그 기억을 벗어나기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닐까. 적어도 한국 대중영화는 그런 조짐이 보인다. 이제 영웅들이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3. 실패하는 유사 영웅들
여기선 <괴물>과 <추격자>를 간략하게 살펴보려 한다. 두 영화에선 모두 주인공(들)이 영웅의 짐을 떠맡고 싸워 외형적으로 승리한다. 관객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첫째, 가련한 여자(아이)의 생명을 위해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둘째, 그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는 공히 괴물(<괴물>에선 말 그대로의 괴물, <추격자>에선 연쇄살인마)로서 공동체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결국 괴물은 제압된다. 이것은 비로소 도착한 승리의 노래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두 주인공은 승리하지 못했다. <괴물>에서 노점상 강두는 딸 현서를 구출하지 못했으며, <추격자>에서 포주 중호는 창녀 미진을 구출하지 못했다. 괴물은 죽고, 연쇄살인마는 체포되었지만, 결말은 애매하거나 우울하다. 강두는 괴물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믿고 혼자 한강변을 지키고 있으며, 중호 뒤로 빛나는 네온사인이 또다른 연쇄살인범을 배태할 것이라는 암시로 가득한 마지막 장면에서 참담한 얼글로 미진의 딸 앞에 서 있다.
가까스로 영웅이 도착했는데, 그들은 온전하지 못하며(강두는 정신적 능력의 면에서, 중호는 포주라는 사회적 신분의 면에서) 결말에서도 각성하거나 온전한 상태로 회복되지 않는다. 괴물을 배태한 질서는 고스란히 살아있고, 가련한 여자(아이)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헛발질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영화는 결국 실패하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끝내 성공하는 괴물의 이야기이다.
<괴물>에서 미군의 독극물을 먹고 자란 괴물은 현서를 끝내 ‘먹었다’는 의미에서 텍스트 내에서의 승리자이기도 하지만 그것의 스크린상의 현전이 미국적 테크놀로지의 승리를 함축한다. <추격자>의 연쇄살인마 지영민은 미진을 결국 살해한 뒤에 여유 있게 경찰을 따돌리고 미진의 얼굴과 손을 어항에 넣고 감상하며 승리를 자축한다. 이 과정에서 개입된 작위성과 우연은 텍스트의 자질을 훼손할 정도로 심각하지만, 그것이 관객의 어떤 의문과 저항에 부딪히지 않는 순간, 관객은 그의 승리를 함께 그러나 은밀히 축하하고 있다. 그 승리를 위해 가련한 소녀 현서, 그리고 더 가련한 창녀 미진은 목숨을 지불했다.

4. 맺으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살하는 주인공에 동화되지 않고, 여자(아이)의 목숨을 건 게임을 벌인, 실패한 영웅과 승리한 괴물 사이에 놓여 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리얼리즘이라기보다 냉엄한 자연주의다. 연민으로 가득한 초상화에서 참혹한 자연주의적 풍경화에로의 이행. 자살의 행렬은 멈춘 대신, 그 풍경 안에서 자살의 연민을 대신하는 매혹적 대상으로 선택된 여자(아이)의 살해를 우리는 승인한다.
어찌하여 한국의 성공한 대중영화는 자기도취적인 자살과 가학적이고 끔찍한 살해 사이에서 갈라져 있을까. 이것은 이행일까. 아니면 앞으로 지속될 어떤 패턴의 반복일까. 한국전쟁 혹은 광주의 민족적 체험, 스나미 사건의 실제 동영상, 미얀마 지진의 실제 동영상, 김선일의 처형 장면과 9.11의 뉴스릴과 같은 살륙의 스펙터클의 만연 속에서 한국의 대중영화는 왜 삶의 동학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이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관객으로서의 우리는 왜 병적인 죽음의 형상에 그토록 매혹되는 것일까. 이것이 지울 수 없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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