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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에서 지식창조의 공간으로
지식창고에서 지식창조의 공간으로
  • 교수신문
  • 승인 2008.06.30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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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벽의 ‘새롭게 만들어 가는 대학’] 7. 도서관

“정보화 시대의 도서관은 책(지식)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지식인(人)이 모이는 곳이 돼야 합니다.
도서관은 아이디어가 수집된 곳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샘솟는 곳이 돼야 합니다.”

1978년, 대학생 시절 필자가 찾은 도서관은 절간만큼 조용했습니다. 도서관을 들어서는 순간 높은 천장과 끝없이 늘어선 책장을 보면서 마치 성지에 들어온 분위기를 느꼈으며, 그 곳에서는 공부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할 때에는 필히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실제로 도서관의 구석진 곳에는 책상들이 마치 마구간처럼 칸막이로 가려져 있어서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조용히 공부하기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큰 테이블이 놓여있었지만 공부는 각자 하다가 쉴 때만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커피를 마셨습니다. 물론 도서관 안에는 음식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려면 도서관 옆의 학생회관까지 가야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8년, 갓 교수가 된 필자가 찾은 도서관은 한쪽으로 복사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기계 잡음이 귀에 몹시 거슬렸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교수에게 도서관이라는 곳은 연구에 필요한 책과 논문지를 찾으려 잠시 들리는 곳이었으며, 무거운 문헌들을 연구실까지 들고 오지 않고 즉석에서 필요한 페이지만 복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여전히 마구간식 단독책상에 코를 막고 외로운 공부에 여념이 없어보였습니다.

또 10년 후인 1998년, 어느덧 중견 교수가 된 필자가 찾은 도서관은 더 이상 조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도서관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마치 호텔로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중잡지와 최신 베스트셀러 책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큼직한 소파와 푹신한 의자가 낮은 커피 테이블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잡지를 보는 사람도 있지만 두서넛이 함께 모여 나직하게 이야기 나누기도 하고, 커피 냄새가 진동하기도 했습니다. 어느새 에스프레소 커피숍이 도서관 안에서 당당하게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필자가 도서관을 찾은 이유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웬만한 논문은 연구실에서 발 한 자국 옮기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뽑아볼 수 있으니 도서관을 찾은 이유는 타과 교수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다학문 연구를 의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의논이 진지해질 것을 대비해서 미리 독방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도서관에는 서너 명을 위한 방부터 열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가 미팅할 수 있는 방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둘러앉아 토론하기 좋도록 널찍한 테이블과 편안한 의자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2008년 현재, 한국으로 되돌아온 필자가 찾은 대학 도서관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면서 1978년으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천장까지 쌓여있는 책과 조용히 홀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물론 색다른 모습도 보입니다. 정보화 바람을 타고 도서관에 인터넷 연결과 DVD 관람을 위한 컴퓨터와 모니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방도 새롭게 꾸며져 있습니다. 간단한 음료와 간식거리를 파는 자판기가 놓인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숙”, “잡담금지” 등의 문구가 여기저기 붙여 있는 모습과 조금만 북적여도 꽂히는 찌푸린 눈총이 예전과 같습니다.

여러 대학에서 디지털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도서관을 새롭게 짓거나 리모델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도서관의 기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작 인터넷라인을 끌어들이고 디지털 검색을 하는 장비를 갖추고 첨단 시청각자료실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어야 하겠습니다. 아직 개인 컴퓨터가 없는 학생이 있지만, 급하다면 동네 PC방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구태여 도서관까지 찾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쉴 때 시청각자료실에서 인터넷 서핑을 하기에는 매우 편리하겠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이 그저 학생과 교수에게 약간의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대학 한 중앙에 우뚝 서 있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보화시대의 도서관은 어떤 곳이어야 할까요.

일단 책을 찾아보려는 곳은 아닐 것입니다. 2006년도에 구글이 하버드대, 미시간대, 스탠퍼드대, 옥스퍼드대, 뉴욕시 등 다섯 곳의 세계 최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을 디지털화해서 인터넷에 제공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초기에는 책 천오백만 권 정도를 계획하였지만 22개 도서관이 추가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바람에 디지털화 규모가 훨씬 더 커졌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최소한 영문으로 되어있는 책은 안방에서 마음껏 볼 수 있게 됩니다.

논문을 찾기 위한 곳도 아닐 것입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SCI에 등록된 대다수의 논문지가 디지털화돼 연구자에게 무료 또는 약간의 수수료로 무한정으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을 찾기 위해 비오는 날에 비를 맞아가면서도 도서관을 찾던 시절이 먼 옛날이야기 같이 느껴집니다. 밤 12시가 넘어서 급하게 논문을 찾다가 도서관이 닫혀있는 걸 보고 24시간 개방할 것을 본부에 요구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이젠 논문을 찾아보기 위해 연구실 밖을 나가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홀로 조용하게 공부하기 위해서도 아닐 것입니다. 70~80년대의 한국대학에는 학생들이 자습할 수 있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도서관에 몰렸고, 책상 터 잡는 일이 보통 치열한 경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굳이 도서관이 아니라도 공부할 곳은 여기저기 많습니다.

물론, 아직 우리 주변에는 도서관에서 책장 사이를 거닐다가 눈에 뜨이는 책을 골라잡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빠서 도무지 읽을 시간이 없지만 일단 책을 대여하고 도서관을 나설 때의 뿌듯함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은 계속해서 예전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보화시대의 도서관은 오로지 책을 접하기 위한 곳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보화 시대의 도서관은 책(지식)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지식인(人)이 모이는 곳이 돼야 합니다. 지식을 만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지식인을 만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도서관은 아이디어가 수집된 곳이 아니라 아이디어가 샘솟는 곳이 돼야 합니다.

도서관이 대학 중앙에 우뚝 서 있는 이유

앞으로 10년 후인 2018년, 은퇴를 바라보는 필자가 찾고 싶을 국내 대학도서관은 지식인의 유통센터입니다. 도서관을 들어서면 지적전통의 무게가 느껴지고 또한 그 전통과 함께 한다는 설렘에 가슴이 벅차 올라오는 곳입니다.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나 5성급 호텔처럼 아래위로 뻥 뚫려있는 로비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돌아보면 도서관이 상징하는 지식과 배움에 대한 존중심이 자극됩니다. 높은 천장과 텅 빈 공간이 마음에 여유로움을 가져줍니다. 소파에 앉아 대문짝만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마음마저 활짝 열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전공서적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연구실은 질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기에 좋지만 가지 각종의 서적이 널려 있는 도서관은 새로운 질문을 발상하기에 좋습니다. 연구실이 수렴적 사고에 적절하다면 도서관은 발산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는 셈입니다.

도서관 이곳저곳에서 여러 학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다학문 팀워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방음장치가 된 독방에 모여 있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그들의 제스처는 필시 안에서 불꽃 튀기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수들도 여러 학과소속 교수들이 모이는 경우에는 도서관을 선호합니다. 학과 회의실에서 모일 경우에는 그 학과가 주도한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도서관에서 모일 때는 모두 동등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별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도서관이 좋습니다.

예전의 도서관이 지식과 인간의 조용한 독대를 주선해주는 곳이었다면 정보화시대의 도서관은 지식인들이 만나 지적 한마당을 펼치는 곳인 것입니다. 전문가의 손으로 분류되고 정돈된 예전 아이디어가 보관된 지식창고 센터가 아니라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만들어지는 지식창조 센터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도서관이 지식기반시대에도 계속해서 대학 중앙에 우뚝 서 있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동국대·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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